지난해 12월 방문한 독일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의 만남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이번 독일 방문은 집권여당인 기독사회당의 싱크탱크인 한스자이델 재단의 초청으로 이뤄진 일정이었다. 한스자이델 재단은 독일의 도시발전과 재생을 주제로 독일 각 정당과 도시 책임자들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며, 나와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초청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여러모로 많이 지쳐 있었을 때여서 만남에 대해서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다. 일단 각종 일정을 소화하느라 물리적으로 너무 바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9월 총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해 놓고도 연정에 실패해 방문 당시 3개월 째 정부를 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현지에서 ‘메르켈 피로감’을 운운하며 사실상 정치 수명이 다했다는 평가마저 나올 정도였다. 이 정신 없는 와중에 한국 의원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러나 어려울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메르켈 총리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일행 앞에 나타났다. 자신감이 넘쳤다. 외국 손님을 대하기 위한 의례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는 괜찮다’라고 힘차게 주문을 외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은 짧았지만 그의 에너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우리 일행을 환하게 웃으며 환대했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우리 일행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 노력해 달라는 당부를 건넸다.
메르켈 총리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독일의 복잡한 총선결과가 있었다. 지난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은 33%, 사민당은 20.5%의 지지율을 획득, 거대 양당 모두 최악의 선거결과를 받아 든 반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13%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선거 전날 메르켈 총리는 “극우정당을 찍느니 기권하라”고 했고,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도 “극우정당은 민주주의의 무덤을 파는 묘지기”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허사였다.
사민당은 총선 후 메르켈 총리와의 앞선 대연정으로 당의 정체성이 흔들렸다며 일찌감치 ‘야당선언’을 한 상태였다. 거대양당이 줄어든 빈자리에 AfD를 비롯해 중도우파 자유민주당(10.7%), 극좌 좌파당(9.2%), 중도좌파 녹색당(8.9%) 등 4개 정당 득표율이 두 자릿수에 육박했기 때문에 메르켈은 우선 야당선언을 한 사민당과 극좌 좌파당을 제외한 자메이카(기민·기사 연합-검정, 녹색당-녹색, 자유민주당-노랑 등 각 정당의 상징색을 딴 명칭) 연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야심 차게 추진한 자메이카 연정 협상이 실패하자, 주변에선 차라리 극우정당과 손을 잡으라는 회유와 압박도 있었다고 한다. 총선을 다시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각종 정치적 난관에도 메르켈 총리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일행과 메르켈 총리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카타리나 란트그라프(기민당) 연방 하원의원의 설명을 빌리자면, 메르켈 정치의 힘의 바탕은 ‘원칙’이었다. 란트그라프 의원은 동독 여성 출신의 3선 의원으로, 메르켈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정치적 동지다.
한번은 란트그라프 의원이 바깥의 여론을 전하며 극우 정당과의 연정에 대해 운을 떼봤다고 한다.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을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 오스트리아 등 여타 유럽 국가에선 극우정당이 연정에 참여해 유럽 정치권 전체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메르켈은 단호했다. “절대 극우당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고 고개를 수차례 절레절레 내저었다고 한다. 독일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자신보다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이념의 정당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원칙을 확고히 내보인 것이다. 히틀러 치하 악몽을 기억하는 독일에선 더욱 그러했다.
“길이 아니면 함부로 가지 않겠다”로 요약되는 메르켈의 뚝심 정치에 결국 메르켈을 도와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커졌고, 사민당도 애초 입장을 바꿔 연정 참여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14일 메르켈 총리 4기 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메르켈 총리와 독일 정치인들로부터 배운 또 다른 덕목은 나와 생각이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한 포용과 존중이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할 일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앞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당내에서조차 난민 문제를 둘러싸고 곤혹을 치렀다. 당내 젊은 우파 정치인들은 메르켈이 지나치게 온정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면전에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기존 우파 노선과는 거리가 있었던 난민 수용, 탈핵 정책 지속 추진 등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갔다.
마치 앞서 사민당의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좌파 노선과 거리가 먼 노동개혁을 밀고 나가다가 정권을 잃었지만 훗날엔, 독일 경제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익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장기적으로 바라보려는 독일 정치인들의 묵직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독일에서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적 결단이 가능한 배경에는 상대를 적대시하지 않고 공익을 우선시하는 정치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독일 방문 중 만나본 독일 연방 하원의원들은 상대당을 늘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한번은 “보수 성향인 기민 기사당이 왜 녹색당하고 손을 잡으려 드냐”고 묻자, “녹색당도 많이 변했다. 배울게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서로 헐뜯기 바쁜 한국의 여야 정치 대립구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행보였다.
우리 정치권이 메르켈 총리가 보여준 원칙과 포용의 정치 의미를 배웠으면 한다. 나부터 길이 아니면 함부로 가지 않고,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내는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을 본받아,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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