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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기자에서 ‘옥상화가’로… 사회적 자아 버리고 찾은 행복

입력
2018.04.13 09: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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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인왕산 자락에 사는 화가 김미경씨. 서울 옥인동 집 옥상은 그의 훌륭한 작업실이다. 그는 종종 거리를 무대 삼아 춤을 추기도 한다. 처음엔 팔과 어깨가 아파 몸을 쭉쭉 늘인 게 춤이 됐다고. 4월의 봄바람 사이로 그의 웃음 소리가 흩어졌다. 고영권 기자
겸재 정선의 인왕산 자락에 사는 화가 김미경씨. 서울 옥인동 집 옥상은 그의 훌륭한 작업실이다. 그는 종종 거리를 무대 삼아 춤을 추기도 한다. 처음엔 팔과 어깨가 아파 몸을 쭉쭉 늘인 게 춤이 됐다고. 4월의 봄바람 사이로 그의 웃음 소리가 흩어졌다. 고영권 기자

그저 대청소를 하던 중이었다. 20여 년 밥벌이의 묵은 때를 싹싹 벗기고 싶었을까. 유난스런 손길은 현관문을 넘었다. 살던 다세대주택의 계단까지 쓸고 닦으며 올라간 옥상, 거기에 삶이 있었다. 켜켜이 세월 쌓인 지붕의 기왓장, 빗물 막으려 덮어둔 비닐의 깊은 주름과 창문들, 그 가운데 우뚝 선 전봇대…. 그리고 저 멀리,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인왕산이 그 생의 현장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딱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옥상의 풍경’과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청소는 그만 두고 구도부터 잡았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매달려 스스로 이름 붙인 연작의 첫째 ‘서촌옥상도 Ⅰ’을 완성했다. 2014년 초봄의 일이다. 그때부터 내 집, 네 집 가리지 않고 옥상에 올랐다. 그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집과 집 사이 나무, 가지에 달린 푸른 잎의 다른 표정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옛모습을 간직한 서촌이기에 가능했다. “그 자체로 역사였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데 뒤엉켜 있었죠. 나 자신도 통인시장 근처 몇 번째 골목 어느 집에 사는 김미경이 아니라, 인왕산 자락에 사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옥상에서 내려다본 풍광은 시간과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모든 것들이 압축된 이미지였어요. 그건 바로 우리의 삶이죠.”

지금까지 그린 옥상도만 45점. 2015년 2월 첫 개인전에서 11점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렇게 ‘옥상화가’로 이름을 알려, ‘서촌화가’, ‘동네화가’로 확장했다. 그의 스케치북에도 옥상의 풍경뿐 아니라 서촌의 골목, 인왕산 자락의 진달래가 들어찼다.

김미경(58) 작가의 스토리가 흥미로운 건, 그가 기자 출신 화가이기 때문이다. 1988년 ‘한겨레’ 창간 때 합류해 2004년 퇴사하기까지 17년 간 기자로 살았다. 머리와 발로 팩트를 좇는 삶과, 마음과 손으로 팩트 이상을 그리는 삶이라니. 이 이질적인 생의 교차로를 건너게 된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맑은 미소를 지녔다. ‘나 정말 행복해요!’라고 외치는 그 표정은, 기자 시절엔 분명히 없었을 테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그럴 생각도 없는 그는 자신 있게 “소질 있는 화가”라고 말한다. 화가의 소질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믿어서다. 지난해 10월의 세 번째 개인전 제목처럼 ‘좋아서’ 그림 그리는 김미경, 그는 그래서 이전보다 한껏 주름이 깊고 많아진, 그래서 넓어진 마음의 표면적으로 세상을 음미하며 산다. 4월의 봄기운이 어린 서울 수성동 계곡으로 느릿느릿 부유하듯 그가 걸어왔다. 동네가 작업실인 그는 오른쪽 어깨에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부진 접이 의자를 매고 있었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걷혀서 하늘이 파랗네요.

“저기 핀 꽃 좀 보세요. 여기가 이렇게 좋아요.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그리곤 했던 자리예요. 저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진달래가 피어있는 곳도 있어요. 내가 ‘미경이 진달래’라고 이름 붙인 진달래도 있죠. 난 다시 태어나면 진달래가 되고 싶어!”

-아니 왜요?

“우스갯말로 동물적인 삶을 살았으니 식물적인 삶도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요. 하하. 진달래처럼 한 자리에 피어나서 바람도 맞아보고, 뿌리도 내려보고, 꽃도 피워보고, 또 비바람이 너무 거세면 일찍 지기도 했다가 이듬해 또 피어나고….”

-꽃에서 무얼 봤기에 그런가요?

“음, 인생 같아요. 꽃은 뻔히 질 걸 알면서도 정말 열심히 피거든요. 그것도 엄청 ‘디테일하게’ 열심히 피고 져요. 우리가 다 죽을 줄 알면서도 살잖아요. 굳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듯이. 찰나로 피고 져도, 그거 자체가 의미이고 인생이라는 진리가 담겨 있는 거죠. 그래서인지, 꽃을 그리고 나서 성격이 좋아졌어요. (웃음)”

‘옥상화가’, ‘동네화가’, ‘서촌화가’... 곳곳이 작업실인 김미경 작가에게는 펜과 스케치북뿐 아니라 어깨에 맨 접이 의자가 필수품이다. 그의 뒤로 수성동 계곡 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고영권 기자
‘옥상화가’, ‘동네화가’, ‘서촌화가’... 곳곳이 작업실인 김미경 작가에게는 펜과 스케치북뿐 아니라 어깨에 맨 접이 의자가 필수품이다. 그의 뒤로 수성동 계곡 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고영권 기자

-옥상, 골목, 숲속... 왜 밖에서 그림을 그리나요?

“수만 가지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게 다 그림에 들어가는 거라…. 안에서 그리는 것과 달라요. 물론 스케치해놓고 실내에서 작업할 때도 있지만, 주로 밖에서 그려요. 바람, 햇볕, 공기… 이런 것들이 나를 휘감아요. 그 순간을 느끼는 게 정말 행복해요. 또 골목에는 스토리가 있어요. 동네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그래요. ‘어, 여기 이 집 뒤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내가 첫 애를 낳았어요’, ‘몇 살 때까지 이 골목 끝 집에 살았어요’ 해요. 서촌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어릴 적 동네를 그림에서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도 동네 찻집에, 식당에, 약국에 내 그림이 걸려있는 게 좋아요. 나는 ‘동네화가’니까. (웃음)”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최근 (성폭력 가해) 일로 안타깝게 되긴 했지만, 박재동 화백이 ‘한겨레’에서 만평을 그릴 때 기자들을 모아서 그림 동호회를 했어요. 저도 활동했죠. 근데 동호회에서 내가 제일 못 그렸어요. 하하. 일주일에 한번씩 점심에 모였는데, 50분 동안 그림을 막~ 그리고 짜장면 10분 먹고 헤어지는 식이었어요. 그것도 취재가 생기면 못 가기도 하고. 그래도 꾸준히 활동해서 매년 창간일(5월 15일) 즈음 전시회를 했지요.”

그는 “진짜, 내가 제일 못 그렸다”며 방에 들어가 주섬주섬 스케치북 10여권을 들고 나왔다. 당시 동호회 회원들의 것이었다. 드로잉 작품 같은 수준의 데생도 눈에 띄었다. 페이지를 넘기더니 그는 인물 소묘 하나를 내밀었다. “것 봐요, 맞죠?”하며 까르르 웃었다. 과연 다른 그림들에 비해 그의 소묘는 무척 평면적이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런데도 아무튼 열심히 했어요. 그리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속으로 나도 ‘그림이 왜 이렇게 좋지’ 했죠. 박 화백이 농반진반으로 그랬어요. ‘열심히 그리다 보면 다음 생에는 화가로 태어날 거야.’ 그 얘기에 더 열심히 그렸어요. ‘그래, 화가로 태어나자’ 하면서. 박 화백이 회사를 나가고 나서는 내가 3대 동호회장까지 했다니까요. 그런데 다음 생이 아니라 이번 생에 내가 화가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그래서 늘 자신 있게 ‘소질이란 그리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얘기하죠.”

-게다가 ‘전업 작가’시죠.

“그거 아세요? 나 ‘완판 작가’란 거. 하하. 이렇게 말하면 다른 화가들이 뭐라고 할 텐데. 개인전을 세 번 했는데 내건 그림이 거의 다 팔렸어요. 이유는? 싸서 그렇죠. (웃음) 나는 그림으로 먹고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누구 (돈 있는 사람의) 스폰(지원)을 받아서 그려야 하나? 그건 아니라고 봐요. 직장 관두고 한달 최저 생계비를 따져보니까, 150만원은 있어야 살겠더라고요. 그림을 팔아서 살고, 그래도 부족한 건 원고료랄지, 저작권료랄지 이런 걸로 메우고 있어요.”

김미경 작가의 작품들. 왼쪽 첫번째가 통인시장 근처에 살 때 그린 ‘서촌옥상도 Ⅰ(2014년, 펜, 29.4×42㎝)’이다. 차례로 ‘인왕산 진달래’(2016년, 펜에 수채, 33.5×24.5㎝), ‘두 남자(2017년, 펜, 40.5×31.5㎝)’.
김미경 작가의 작품들. 왼쪽 첫번째가 통인시장 근처에 살 때 그린 ‘서촌옥상도 Ⅰ(2014년, 펜, 29.4×42㎝)’이다. 차례로 ‘인왕산 진달래’(2016년, 펜에 수채, 33.5×24.5㎝), ‘두 남자(2017년, 펜, 40.5×31.5㎝)’.

-회사를 그만 두고 하고 싶은 일을 택하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인데요.

“(기자 생활을 포함해) 27년을 월급으로 살았는데 당연하죠. 처음에는 월급 없이 사는 게 무시무시 하더라고요. 낭떠러지에 훅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이렇게 1년만 살아보자’고 마음 먹었죠. 내 식의 ‘우아한 가난’을 택한 거예요. 이를테면, 택시를 안 타고 부조금도 안 내고… 그런 식으로 (씀씀이를) 줄여서 사니까 또 (생활이) 되더라고요.”

김 작가는 ‘한겨레’에서도 인터넷한겨레 뉴스부장, 여성주의 월간지 ‘허스토리(Herstory)’ 편집장 등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일을 했다. ‘허스토리’ 휴간 사태를 거치며 2004년 겨울 퇴사한 뒤,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딸이 유학 중이던 미국에서 살았다. 뉴욕에서 그가 찾은 일자리는 ‘한국문화원’의 리셉셔니스트(접수 담당자). 2012년 귀국해서는 시민단체 ‘아름다운재단’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2014년 2월 “‘밀당’을 모르는 그림과의 짝사랑”에 빠져 그만 두기 전까지 말이다.

-미국에서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암울했어요. 어쨌든 ‘한겨레’에 피해를 입혔다는 자책감, ‘허스토리’를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뒤섞여서 힘들었죠. 게다가 뉴욕에서는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기자로 살면서 특권의식 따윈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뉴욕에 가보니까 ‘그래도 내가 기자로서 누린 사회적 지위가 있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나도 어쩔 수 없이 ‘어디의 누구’라는 직책이 갖는 명예나 권위라는 껍질에 싸여 살았었다는 걸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미국 생활 7년이 없었다면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예요.”

-왜 그렇죠?

“사회적 자아가 사라지니, 개인적 자아가 쑥~ 올라왔달까. 나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건 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적나라하게 생각하고 들여다 본 시간이었어요. 게다가 내가 살았던 브루클린이 ‘화가의 동네’였거든요. 갤러리에다 뮤지엄 천국이니까. 맨해튼의 ‘모마(MOMAㆍ뉴욕 현대 미술관)’도 수도 없이 다녔고요. 거기다 문화원에서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긴 했지만, 기자 출신이니까 그림 전시 보도자료 쓰는 일도 도왔거든요. 그때 ‘내가 화가라면 이렇게 할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말하자면, 그림에 확 노출돼 살았던 거예요. 그러면서 내 눈도 달라졌더라고요. 당시엔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요?

“모든 게 나를 화가로 만든 양분이었어요. 뉴욕에서 벌거숭이로 살았던 게 가장 강력했고,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봤던 것, 그래서 내 눈이 달라진 것, 문화원에서 화가들의 보도자료를 쓰면서 ‘내가 화가라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죠. 그런데 계속 다니기 미안한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림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아름다운재단 건물 옥상에 올라간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인왕산이 보이더라고요. 너무 흥분해서 그때 썼던 (스마트폰 기종인) ‘갤럭시 노트’로 그림을 그렸어요. 이름하여 ‘서촌옥상도 0’이 그때 갤노트에 그린 그림이에요. 그때부터 어느 정도로 그림에 빠졌냐 하면, 저녁 약속이 너무 싫을 정도였어요. ‘어서 퇴근하고 그림 그려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하하.”

서울 수성동 계곡의 바위 틈에 핀 진달래. 김미경 작가가 ‘미경이 진달래’라고 이름 붙였다. 매년 봄이면 이 진달래를 그린다. 고영권 기자
서울 수성동 계곡의 바위 틈에 핀 진달래. 김미경 작가가 ‘미경이 진달래’라고 이름 붙였다. 매년 봄이면 이 진달래를 그린다. 고영권 기자

그는 또 보여줄 게 있다는 듯, 말하다 말고 방에 들어가 책 크기만한 스케치북을 들고 나왔다. 그 안에는 조바위, 스탠드, 세계여성대회 프레스 카드, 문예지, 액자, 접시 같은 사물의 데생이 있었다.

“그때는 화가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이런 걸 그린 적도 있더라고요. 후배가 준 노트인데, 2005년 미국으로 짐을 다 부치고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 빈 집에서 며칠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이런 걸 그렸죠. 내가 한국에 두고 가는 물건, 가지고 갈지 말지 고민되는 물건 같은 것들.”

그는 어렸을 적 만화책을 보고 따라 그린 스케치까지 갖고 있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게 재미있다.

-어렸을 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요?

“그림을 엄청 잘 그린 건 아니었어요. 미술시간이 영 싫지 않은 정도였죠. 게다가 수업시간 50분 동안 그림 그리고, 경진대회 나가도 2, 3시간 주고 그려 내라고 하고… 그런 교육방식에서는 난 그림에 흥미를 가지기 어려운 성격이었어요. 숨어서, 조용히, 꾸준히 내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거든요. 잠재력이 뭔지 모른 채, 내 몸 안에 있는 99.9%의 DNA는 잊고 교육에 억압 당해 0.1%의 나로 ‘이게 나인가보다’하고 살았던 거죠.”

이런 삶의 길목을 거쳐 그는 지금까지 그림과 제대로 사랑에 빠져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며 사는 삶은 어땠나요?

“너~무 좋은 거죠. 기자가 머리와 손을 쓰는 일이라면, 그림은 마음과 몸을 쓰는 일이잖아요. 20년 전 ‘한겨레’ 동호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림 그릴 때 느낀 기분의 정체를 당시엔 몰랐거든요. 그 이후의 삶을 되돌아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내 인생에서 그림이 시나브로 쌓여왔던 거예요.”

-그렇게 ‘좋아서’ 그림에 빠졌어도, 보통 사람은 직장에 사표를 내기 쉽지 않죠.

“생각해보면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맹목적 결단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내 나름으로는 근본적인 마음과 감정의 방향을 따른 거죠. 아름다운재단을 그만 둘 때, 심지어 빚도 있었어요. 경기 김포시에 갖고 있던 집은 팔리지도 않고. ‘월급 없이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이 왜 없었겠어요? 친한 선배한테 당시에 돈을 빌리면서 ‘1년 동안 일단 이렇게 살아보고 안 되면 취직을 해서 갚겠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자나깨나 그림만 그렸죠. 하도 걸어 다니면서 그리니까 무릎이 나가기도 하고 오른손이 너무 아파 움직일 수 없어서 왼손으로도 그리고 옥상 찾아 그리다가 쫓겨나기도 하고요. 하하.”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기자에서 화가로 인생의 행로를 바꾼 김미경씨.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뒤편의 이젤에 그가 얼마 전 제주에서 그린 4월의 동백이 보인다. 고영권 기자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기자에서 화가로 인생의 행로를 바꾼 김미경씨.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뒤편의 이젤에 그가 얼마 전 제주에서 그린 4월의 동백이 보인다. 고영권 기자

-월급으로 사는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그림을 택해 얻은 건 뭔가요?

“너무 많죠. 경제적으로는 쪼들리지만, 내가 시간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다는 것, 내 감정을 속이지 않고 살 권리를 누린다는 것, 노동에서의 소외가 없다는 것… 이런 게 좋죠. 내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니 누군가는 ‘노동에서 소외는 없어도 자본에서의 소외는 백퍼센트 있잖아’라고 맞받아치긴 하더라만. 하하하. 모든 사람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어요. 이건 그저 내가 사는, 내가 택한 방법일 뿐이에요.”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표정이 그렇게 비추고 있었다. “그림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이미지로 건드리는 일이잖아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나를 훨씬 자유롭게 만들죠. 그러다 보니 이제는 글을 쓰는 게 무척 어렵게 느껴져요. 나한테는 그림이 총체적인 만족을 주는 일인가 봐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림 그리는 김미경’의 삶의 길, 삶의 도는 뭔가요?

“사람, 특히 페미니스트에게는 경제적 독립, 심리적 독립, 신체적 독립이 중요해요. 어쨌든 그림 그리는 나는 적게 벌지만 어디에도 구속돼 있지 않아요. 그저 작은 나의 그림을 사랑해주는 ‘개미 애호가’가 있을 뿐이죠. 그게 나를 자유롭게 해요. 인생의 ‘대박’을 노리지 말고, 가만히 자신의 감수성에 많은 기회를 주세요. 좋아서 하는 일이 뭔지를 찾을 수 있도록. 저에게는 삶이 그림이고, 그림이 삶이에요. 행복에 몸이 푹푹 빠져서 사는 것 같은 느낌!”

그가 득도한대로, 화가에게 소질이 ‘그리고 싶은 마음’이라면, 잘 사는 데에 소질은 ‘잘 살고 싶은 마음’ 아닐까. 제주에서 20일 간 그림여행을 하고 온 지 이틀째라는 그의 얼굴에서 붉은 동백이 보였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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