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와 종교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재판이라 할 만한 갈릴레오 재판이 1633년 4월 12일 시작됐다. 갈릴레오가 종교 법정에서 지동설의 소신을 접고 목숨을 구한 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잣말을 했다는 설은, 다양한 문헌 조사와 연구 덕에 ‘소설’이라는 게 정설이 됐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과 무관하게, 갈릴레오 재판의 저 삽화는 과학과 종교의 유구한(어쩌면 근원적) 불화의 상징이자 알레고리로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2006년 번역 출간된 ‘갈릴레오의 진실’은 과학사학자 윌리엄 쉬어와 가톨릭 신학자 마리아노 아르티가스가 교황청 문서고 등을 뒤져 찾아낸 자료를 근거로 이 재판을 재조명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생애 동안 모두 6차례 로마를 방문했고 마지막 방문이 교황청 검사성성(檢邪聖省ㆍHoly Office) 재판에 출두하기 위한 거였다. 앞서 3년 전인 1630년 다섯 번째 로마 방문 때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옹호하는 내용의 책 원고의 검열 가능성을 타진했고, 2년 뒤 피렌체에서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를 출간했다.
책은 망원경 관측 등을 통해 확인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교황청의 배척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을 탔던 갈릴레오의 꽤나 능란했던 처신-출세의 야심과 인맥 활용, 의도적 모호함으로 과학과 종교 모두의 진실을 차지하려 했던 노회함-을 야멸차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스스로도 1616년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서면 약속, 즉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긴 점을 인정하고 ‘대화’에서 견지한 ‘태양 중심설’을 철회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재판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갈릴레오의 입장은 종교(성서)의 오류가 아닌 해석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어서 그의 재판을 과학-종교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어쨌건 갈릴레오는 뉘우침의 처신 덕에 처형이나 투옥 대신 가택 연금조치를 당했고, 9년 뒤 숨을 거둘 때까지 공적인 삶을 박탈당했다. 그의 사후 350년 만인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과학)에게 사과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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