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동네 유나가야 번주가
꾀를 내어 달려가는 무협활극
당시 에도 풍경묘사 통해
‘조선이 선진국’이란 통념 흔들려
에도 막부의 치세가 이어지던 1735년. 에도의 북동쪽 조그만 촌동네 유나가야 번의 번주 나이토 마사아쓰는 황당한 명령을 받는다. 5일내 60리, 그러니까 240㎞를 주파해 에도성으로 출두하라는 것이다. 지방 영주의 반란을 막기 위해 번주들에게 1년씩 에도로 와서 머물게 하는 참근교대제에 따른 명령이었다.
나이토는 절망했다. 막 참근을 끝내고 돌아온 참인데 또 오라는 것인데다, 그것도 겨우 5일내라니. 더구나 참근의 핵심은 쇼군에 대한 충성심 과시였다. 오란다고 그냥 가면 되는 게 아니라 번 규모에 따라 수백, 혹은 수 천명의 사람을 사서 폼 나는 퍼레이드를 벌여야 했다. 명령을 제때 이행 못하는 것은 물론, 행렬이 옹색해도 반역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돈도, 사람도, 시간도 없는 가난한 시골 영주 나이토가 절망한 이유다.
이 사태는 막부의 탐욕에서 비롯됐다. 막부 실력자 마쓰다이라 노부토키는 유나가야 번의 시라미즈무라 금광에서 금맥이 터졌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참근 명령은 나이토를 제거하고 번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음모다. 5일만에 에도로 오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린 데 이어, 만약을 대비해 최고의 닌자들을 방해꾼으로 몰래 파견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나이토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일단 무조건 가야 한다. 소설은 나이토가 꾀돌이 참모 소마, 비밀스러운 사연을 숨기고 있는 닌자 단조 등 고작 7명의 부하를 이끌고 노부토키의 방해공작을 뚫고, 성대한 행렬을 거짓으로 꾸며가면서, 지름길을 가로질러 에도로 가는 닷새간의 여정을 그려낸다.
착한 아저씨 나이토에게 ‘5일 뒤 쇼군 알현’이라는 명백한 임무가 주어진 이상, 작가는 ‘과연?’과 ‘제발!’을 오가는 독자들 마음을 농락하는데 집중한다. 애초에 영화 시나리오로 쓴 것을 소설로 고쳐 썼기에 압축적으로 쑥쑥 읽힌다. 순간순간 유머코드도 적절하게 숨어있는, 쭉쭉 읽히는 명랑 무협활극이다.
굴하지 말고 달려라
도바시 아키히로 지음ㆍ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발행ㆍ388쪽ㆍ1만4,000원
이 소설이 주는 재미의 반은 소설 그 자체이고, 나머지 반은 18세기 에도 시대 풍경묘사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뿌리와이파리)를 쓴 전직 외교관 신상목의 해설이 붙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적어도 근대화 이전엔 조선이 앞서 있었다는 통념을 흔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딱 하나만 말하자면, 조선통신사 문제다. 우리는 ‘국사’ 교과서를 통해 조선통신사를 매개로 우월한 조선의 문명이 미개한 일본에게 전해졌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거, 진짜일까. 일본 사람들 눈에 조선통신사 행렬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진행하는, 조금은 신기한 참근교대 행렬 같은 것 아니었을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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