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2일 이라크 총선
미국 이어 IS와의 15년 전쟁
"교파ㆍ민족 초월" 주장 커져
근본주의 성직자도 "종파 해소"
시아파 출신 압바디 총리
되레 수니파 지역서 지지 높아
"이라크 문제 해결될 것" 관측도
“차라리 수니파에게 투표를 하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15년? 시아파 정부가 집권한 이래 아무 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 이라크 바그다드 근교 사드르시티에 거주하는 젊은 주부 사브린 하솀은 미국 공영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 현 정부의 무능력에 불만을 토로했다. 사드르시티는 이라크 내 시아파 최대 종교 지도자인 무크타다 사드르를 지지하는 ‘사드르 운동’의 중심지다. 시아파 유권자가 수니파 지지를 입에 담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2003년 미국 침공으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후 종파와 민족으로 나뉘어 바람 잘 날이 없던 이라크 정치권에서 종파주의 색채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로 나뉘었던 정당들이 이제는 교파와 민족을 초월해 이라크 국민정당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맞서 하나로 뭉쳐 싸운 경험이 오랜 전쟁에 지친 이라크인들을 하나로 묶어 냈기 때문이다.
종파 초월 표방한 시아파 정당들
NPR 등 서구 언론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사드르의 대변신이다. 미군에 맞서 민병대를 조직해 항전할 정도로 근본주의 투사였던 그가 이번 총선에는 세속주의 정당 공산당과 연합해 ‘진실성(Integrity)’당을 창설했다. “이라크를 좀먹는 부패와 종파주의와 맞서는 정치 세력이라면 누구와도 연합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사드르는 지난해 수니파 본산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를 차례로 방문했고 사우디의 미래권력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동하기도 했다. 이 역시 이란의 영향을 벗어나 종파를 초월하겠다는 표시다.
사드르 외에도 시아파 정당들은 일제히 종파주의 해소를 새로운 의제로 내걸었다. 하이다르 압바디 현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의 승리’ 연합은 쿠르드인과 수니파 유력 정치인들 영입해 유권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흔히 시아파 민병대로 알려진 준군사조직 인민동원군(하시드 알샤비)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복연합과 국민지혜운동 등도 수니파가 다수인 북부와 서부에 걸쳐 수니파 후보를 내세우며 민심 공략에 나섰다.
민심도 이런 움직임에 우호적이다. 2017년 미국 국가민주연구소(NDI)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압바디 총리의 지지율은 역대 최초로 시아파 지역(남부)보다 수니파 지역(서부)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 이는 압바디 총리가 인민동원군에 수니파 무장단체를 대거 받아들이고, 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 민병대(페쉬메르가)를 아우르는 병력으로 모술 수복전을 펼쳐 IS와의 오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IS의 침공 초기에는 참패를 거듭하며 신뢰를 잃었던 이라크 정부군도 지지를 회복했다. 77%가 “이라크 정부군은 전체 이라크를 대표한다”고 답했고 “IS와 전쟁이 이라크를 통합했다”는 응답도 78%에 이르렀다.
15년 전쟁 끝 교훈은 통합
2003년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당 정권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이라크에는 민주정이 수립됐지만 이는 표면 상의 민주주의일 뿐이었다. 지역 부족들이 각지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형성했고 권력과 예산을 나눠 차지했다. 이들은 분쟁이 격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종파ㆍ민족 쿼터를 설정해 권력을 분점했다. 수니ㆍ시아ㆍ쿠르드가 한꺼번에 집권 연정에 참여했다. 상징적 국가수반인 대통령은 쿠르드, 행정 실권자인 총리는 시아파, 입법부를 이끄는 국회의장은 수니파가 차지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형성됐다. 물론 정부의 실질적 수장은 총리를 쥔 시아파였고 자연스레 수니파의 불만이 쌓였다.
그러나 IS와의 전쟁을 거치며 종파주의는 힘을 잃었다. 바그다드 정권을 양분하며 권력 투쟁을 벌이던 시아파와 수니파는 IS의 등장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며 함께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대 IS 전쟁의 주역은 시아파 민병대 중심으로 결성한 인민동원군과, 북부 전선을 유지해 풍전등화의 키르쿠크와 바그다드를 구해낸 쿠르드 민병대였다. 그러나 쿠르드 집권세력인 쿠르드민주당(KDP)은 어디까지나 쿠르드 정당일 뿐 이라크 전체를 대변할 세력은 아니었다. 지난해 마수드 바르자니 전 자치정부 수반의 ‘섣부른’ 독립 투표 시도가 좌절되고 키르쿠크 유전 지대마저 잃으며 다시 힘이 약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아파 정체성을 주장하던 정당들이 일시에 전국 정당을 표방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오래도록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라크’라는 상상이 IS와의 전쟁을 거치며 현실로 드러났다. 게다가 종파주의와 부족 이기주의는 부패와 자원 독점을 유발하고, 국제 사회의 투자 유입을 막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2016년 성직자 사드르가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바그다드 정부기관이 결집한 ‘그린 존’을 장악해 반부패 시위에 나선 것은, 그가 자원 분배에서 밀려난 시아파 도시 빈민들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압바디 총리, ‘승리’ 불구 집권 불투명
종파주의의 힘이 줄어들고 있지만 실제로 차기 정부가 어떤 모습을 취할지는 불투명하다. IS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압바디 총리는 올해 초만 해도 연임이 유력했다. 그러나 2014년 물러난 누리 알 말리키 전 총리가 재도전을 선언하면서 집권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 압바디 총리는 시아파 민병대 세력인 정복 연합과 선거 연대를 선언했다가 24시간도 되지 않아 관계를 단절했다. 압바디 총리보다도 민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정복 연합의 하디 아미리를 포섭하지 못한 것은 압바디 총리에게 뼈아픈 결과가 될 수 있다.
수니파 정당들은 IS 점령지역이 수복됐지만 난민들이 본거지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 선거에 불리한 상황이다. 쿠르드의 경우 자치정부 집권당인 쿠르드민주당이 선거 보이콧을 선언한 가운데 연합 세력인 쿠르드애국동맹(PUK)이 대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비록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는 없지만, 압바디와 말리키라는 두 시아파 지도자가 경쟁하는 가운데 캐스팅 보트 역할은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또 IS와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영웅인 인민동원군과 쿠르드 민병대는 어떤 형식으로든 바그다드 정부에 청구서를 내밀 것이 확실하다.
이라크에 종파주의 색채가 약화되긴 했어도 현실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패 문제를 해소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종파ㆍ부족 간 화해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브라힘 마라시 캘리포니아주립대 중동사학 교수는 “여전히 분열된 이라크 선거에서 희망적인 부분은 종파주의에서 탈피해 개혁하자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선거 결과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이룸으로써 이라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보게 된다”고 논평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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