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앞선 대전(大戰)에서의 행위에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 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5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발표한 ‘종전 70년’ 담화다. 하지만 피해 당사국의 용서를 얻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과거형 사죄, 사과의 주체가 사라진 유체이탈 화법 등 교묘한 언변으로 식민지배와 침략을 은폐한다는 비난만 샀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장의 그늘에는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가 전부였다.
▦ 개인의 사과와 달리 국가 간, 정상 간의 사과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다. 사과 한마디에 따라 정권의 도덕성, 법적 책임, 국가의 자존심 등 적잖은 후폭풍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라는 직접 표현 대신 유감 표명으로 대신하고, 불가피할 경우 개인, 혹은 일부의 과실로 몰고 가려 한다. ‘더 이상 논란을 키우지 말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자’는 얘기다. 하지만 철저히 가해자의 논리다. 독일의 과거사 사죄가 평가 받는 것은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는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 사과에 인색하기는 북한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1996년 동해 잠수함 침투 사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2015년 비무장지대 목함 지뢰 사건 등 숱한 도발과 만행에도 유감만 표명했을 뿐 사과하지 않았다. 북한이 우리한테 한 사과는 1968년 청와대 습격 시도에 대해 4년 뒤 한 지각 사과가 거의 유일하다. 우리 병사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는 지금껏 일언반구 말이 없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한 게 최고지도자의 육성을 빈 첫 사과로 기억한다.
▦ 북한의 뻔뻔함은 아마도 최고존엄의 무결성(無缺性), 주체의 완결성 같은 교조적 시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그제 우리측 기자단의 평양 공연 취재가 거부된 것과 관련, 천안함 폭침 배후로 지목되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자유로운 촬영을 하지 못하게 한 건 잘못”이라고 사과한 건 극히 이례적이다. 잘못을 시인한 건 좋지만, 평소 북한의 행태를 봤을 때 저의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다음에는 말이 아닌 행동을 봤으면 한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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