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혁명 와중 美 대사관 인질극
2002년 ‘악의 축’ 선언... 대립 절정
1980년 4월 7일,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의 완전한 국교 단절을 결정했다. 이후 이란과 미국은 38년째 공식 외교관계가 없다. 이전까지만 해도 소비에트 연방에 맞서는 미국의 파트너였던 이란은 훗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ㆍ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분류하는 대표 반미국가가 됐다.
대립의 시작은 1979년 이란 혁명이었다. 팔레비 샤가 해외로 쫓겨나자 카터 대통령은 친미 성향이지만 타도를 당한 압제자 샤를 보호할 것인지, 새 정부와 협력할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카터 정부는 내분에 휩싸였다. 사이러스 번스 당시 국무장관은 새 정권과의 대화를 주장했지만, 대화를 반대하는 정부 내 매파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과, 헨리 키신저 등 야당인 공화당 측 압력이 더 강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10월 샤의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이란 내 친 혁명 세력들은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침입해 66명을 인질로 잡았다.
카터 대통령은 결국 이듬해 4월 7일 대사관 완전 철수와 본격적인 경제제재로 대응했다. 5일 뒤인 12일에는 ‘독수리 발톱’이라 이름 붙인 침투작전을 결행해 직원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대원 등 8명이 사망한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직원들 가운데 52명은 무려 444일간 이란에 억류됐다. 카터 대통령은 이란 인질사태의 여파로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 참패했다.
미국의 대소련 포위망 중 하나였던 이란은 이를 계기로 중동에서 한 순간에 미국의 주적이 돼 버렸다.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파트너로 삼아 이란을 봉쇄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을 막기 위해 거꾸로 그간 적대적이던 이라크를 지원했다가 사담 후세인의 야심을 키웠고, 이는 훗날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선언과 이란의 비밀 핵 시설 폭로로 절정에 달했다.
이후 외교적 노력 끝에 2015년 주요 6개국(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이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이른바 이란 핵 협상에 서명하면서 오랜 대립은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핵 협상을 ‘나쁜 협상’이라고 맹비난하며, 올해 5월 12일까지 협상 수정안이 나오지 않으면 합의를 철회하겠다고 못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회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매파 존 볼턴은 9일 국가안보보좌관직에 취임한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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