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3만 쪽 분량 30년 만에 비밀해제
안보 이슈와 88올림픽 앞둔 남북 신경전
1987년 외교 문서가 30일 공개됐다. 외교부가 공개한 30년 전 외교 문서는 1,420권, 23만 쪽 분량으로, 문서에는 외무부와 대사관을 중심으로 한 외교안보 현안과 다자 협상의 뒷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초기 협상 등 첨예했던 국제 대립구조뿐만 아니라 ‘1988 서울 하계올림픽’을 두고 대립했던 남북 간 신경전과 1987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에서 언급됐던 남북 중립국 창설 등 한반도 이슈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노신영 총리 “북한 상황 미저러블”… 한중 밀월도
1987년 당시 국제 사회는 88올림픽에 공산권 국가 참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북한의 반응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는 1987년 1월 유럽 순방길에 나서 남북 정세를 상대국과 공유했다.
총 24권 분량인 ‘노신영 국무총리 구주 순방’ 비공개 외교 문서에 따르면, 노 총리는 포르투갈의 마리오 소아레스 당시 대통령에게 “김일성의 아들(김정일)은 45세로 정기교육을 못 받은 위험스럽고 방탕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노 총리는 “김일성은 전쟁을 겪어 전쟁의 참화를 알고 있으나, 김정일은 그걸 모르는데다 성격상 불장난을 일으킬 확률이 농후”하다며 “개인적으로 앞으로 4~5년간 김 주석이 건강했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크락시 베네데토 이탈리아 당시 수상과의 면담을 기록한 비공개 회담 요록에서, 노 총리는 북한에 대해 “미저러블(비참)”하다고 표현했다. 노 총리는 “평양에는 전시용 건설만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하며, 북한이 서방과의 합작투자를 시도했으니 정치 체재의 경직성으로 인해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회담 요록에는 ‘북한의 폐쇄성’에 대한 이야기도 담겼다. 노 총리는 회담 2주 전에 탈북한 일가에 대해 언급하며 “비교적 고소득층인 의사 가족임에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북한의 폐쇄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소련은 미그-23기와 미사일 등 신무기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으로부터 영공 통과권을 얻었다는 군사비밀도 이 자리에서 오갔다.
중국과의 밀월관계도 가감 없이 표현돼 있다. 요록에 따르면 1986년 아시안게임 당시 중국의 일부 고위층 인사가 선수로 위장, 참가해 우리측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노 총리는 “중국은 공식적으로 북한과 가깝지만 사실상 남한과 가까운 상태”라며 한중 관계에 자신감을 보였다.
■88올림픽 보이콧 위해 동분서주한 북 김영남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987년 ‘88올림픽 보이콧’을 위해 광범위한 외교를 벌였던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우간다 대사관은 1987년 12월, 외무부 장관에게 “김영남 당시 북한 외교부장이 김일성 특사 자격으로 11일부터 15일까지 우간다를 방문한다”고 첩보를 보고했다. 문서에서는 김 위원장의 우간다 방문 목적은 ‘88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주재국에 집요하게 종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당시 대사관이 우간다 외무부 정무국장으로부터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실제로 김 위원장은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문제가 IOC 및 한국 측의 비협조로 실현이 어렵게 됐다”며 올림픽 보이콧을 종용했다.
1986년에는 함태혁 당시 튀니지 주재 대사가 “북한 체육사절단이 체코를 포함한 동국권 수개 국을 방문, 88서울올림픽 보이콧을 교섭하고 다녔으나, 동국권 국가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는 체코 대사의 발언이 비밀 문건으로 만들어져 장관에게 보고되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85년 전영진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말레이시아 외교 차관을 접견, “남한은 반민주 군사독재 체제로서 인권 유린, 사회 불안 등이 만연해 올림픽 개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라며 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한 바 있다.
■87년 북, 고르바초프 통해 한국에 ‘연방제 중립국’ 제안하기도
북한은 1987년 미소 정상회담에 나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움직여 한반도 완충지대와 중립국을 세우는 계획을 구상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과 소련 정황 파악에 주력했던 1987년 외교 문서에 따르면,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같은 해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의 이 같은 구상을 담은 문서를 전달했다.
‘한반도 완충지대 설정 및 중립국 창설을 위한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제안’이라는 문서에서 북한은 “대규모 감군”을 언급하며 “남북한 각각 10만 미만의 병력 유지 및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를 주장했다. 북한은 ▦남북한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 창설 ▦공화국의 중립국가 선언하는 헌법 채택 ▦연방공화국 단일 국호로 유엔 가입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1987년 12월, 최광수 당시 외무부 장관이 주미대사에 보낸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북한의 제안이 “거창하고 현실성이 없으며,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새로운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외무부는 ‘상호 신뢰구축이 먼저’ 라며 정부의 입장을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국에 전달했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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