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항전 스포츠 경기에는 으레 ‘국위 선양’이란 말이 따라 다니지만, 한국은 유별난 경향이 있다. 특히 일본이나 북한과의 경기 때면 한풀이라도 하듯 과도한 아드레날린을 소모해왔다.
1967년 출범한 ‘양지축구단’은 세계 축구사에 가장 이질적이고 기형적인 팀으로 기록될 만하다.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르자 박정희가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타도 북한축구’ 특명을 내렸고, 김형욱이 대한축구협회 임원들을 소집해 국가대표 11명과 군, 대학의 에이스들로 급조한 팀이 양지축구단이었다. 스카우트 형식이긴 했지만 사실상 강제로 조직된 팀이었고, 선수의 징집 일정을 앞당겨 군에 입대시킨 뒤 팀으로 전출시키기도 했다. 정확한 창단 시점은 불확실하지만 축구협회에 등록한 건 1967년 3월 29일이었다.
70년대 이후 선수로, 또 코치나 감독으로 한국 축구를 이끈 김호, 김정남, 이회택이 당시 해병대 군인 신분으로 저 팀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초대 감독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한일전의 영웅으로 ‘아시아의 황금발’이라 불리던 최정민이었다. 광복 10년도 안 된 대표팀의 대일전 패배를 염려해 출전을 불허하려던 이승만을 재일교포단체 등이 설득했고, 당시 축구협회장이던 장택상이 선수들을 불러 “(원정경기서) 패배하면 현해탄의 고기 밥이 되라”며 격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원정 2경기에서 최정민은 혼자 3골을 넣으며 월드컵 출전권을 따내는 데 기여했다. 이제 그의 목표는 북한 타도가 됐다. 김형욱이 선수들에게 “이기라면 이기고, 죽으라면 죽어라”고 주문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랬으니 훈련 강도는 가히 살인적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서울 이문동 정보부 숙소에서 숙식하며 국내 유일 잔디구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한국 축구사상 최초 해외 전지훈련(105일 유럽)에 다녀오기도 했다. 선수들은 국영기업체 간부급 급여를 받았고, 당연히 활동 기간은 군 복무로 인정 받았다. 양지팀은 창단 첫해 메르데카 우승컵을 안았고, 1969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사상 처음 준우승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던 중정의 구호에서 이름을 딴 ‘양지팀’은 김형욱의 실각으로 70년 3월 17일 해체됐다. 선수들은 내도록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고,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생결단’의 정신력도 더불어 배양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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