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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수리수리협동조합 “추억을 고쳐드립니다”

입력
2018.03.28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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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계천 세운상가 내 수리수리협동조합에서 오디오, 의료장비 등 전기전자 전 분야의 수리를 맡고 있는 정음전자 변용규씨. 신상순 선임기자
서울 종로구 청계천 세운상가 내 수리수리협동조합에서 오디오, 의료장비 등 전기전자 전 분야의 수리를 맡고 있는 정음전자 변용규씨. 신상순 선임기자

흘깃 보면 고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물이다. 1956년 독일 노르망디사에서 나온 진공관 라디오부터 30년 전 생산된 영국 쿼드(QUAD)사의 44파워앰프, 수신은 될까 싶은 흑백 텔레비전까지. 5평 남짓(17㎡) 좁은 공간, 천장까지 닿은 선반에 이런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영락없이 1950년대 팝송이 흘러나올 것 같은 외형의 라디오에 전원을 연결하면 교통 정체를 알리는 한국FM 방송이 흘러나온다. 하나같이 박물관에나 어울릴 법한 것들이지만 모두 ‘수리수리협동조합’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로 재탄생, 수리를 끝마치고 주인 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현재진행형’ 물건들이다.

서울 종로구 장사동 116번지. 미로처럼 얽혀있는 ‘세운상가’ 곳곳에는 이런 보물창고들이 촘촘하다. 세운상가는 1967년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 주상복합 건물로, 한때 ‘못 고치는 물건’이 없다는 명성 아래 전기ㆍ전자 메카로 승승장구했다. 값싼 중국산 제품이 대거 등장하고 물건을 ‘고쳐 쓰는’ 사람이 줄면서 자연스레 쇠락했다. 그러다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제조업 기반의 4차 산업혁명 거점으로 되살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차츰 회생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수리수리협동조합은 낙후한 세운상가를 되살리는 ‘다시ㆍ세운 프로젝트’ 일환으로 세운상가 내 수리장인들을 발굴하며 시작됐다. 2017년 3월부터 “추억을 고쳐드립니다”라는 구호 아래 본격 활동에 나섰다. 수리 받을 수 있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첫째, 고치기 어렵지만 꼭 고쳐야 하는 이유와 추억이 깃든 물품일 것.

둘째, 일반 애프터서비스(AS)센터에서 고칠 수 없는 물품일 것.

홈페이지(http://surisuricoop.com)를 통해 사연이 접수되면 오디오부터 조명, 오락기, 비디오, 냉난방까지 각 분야의 수리 장인 6명이 수리에 들어가고 중간 현황도 의뢰인에게 알려준다. 그렇게 지난 3년여간 총 178개의 물건이 수리를 마치고 주인 품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을 버리자니 잔인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자리만 차지하고. 그렇게 애만 태우면서 집안에 처박아뒀던 물건들이 많아요. 반신반의하면서도 다들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거죠.”

빈티지와 진공관, 오디오 전 분야의 수리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수리수리협동조합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승근(73) 장인이 말하는 조합 운영 이유다. 흑백TV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갤러그 등의 오락기, 8비트 컴퓨터부터 노래방 기계까지. 그는 55년간 시대별로 새로운 물건이 등장해 반짝 유행했다가 관심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이곳에서 지켜봤다. 더 이상 수리 일은 하지 않겠다며 가게를 접었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다시 세운으로 돌아왔다. ‘좋은 일’을 함께 하자는데 뿌리칠 수가 없었다.

수리는 애초 큰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물건 자체보다 수리비가 훨씬 더 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협동조합으로 보내온 사연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어떻게 해서든 ‘고쳐주고 싶다’는 사명감이 불끈 솟는다.

“자기를 길러준 작은아버지가 숨진 뒤에, 그때 그 작은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작은아버지가 너무 그립더랍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사용하던 오래된 소니 라디오를 고치려고 일본 본사까지 찾아갔는데 부품이 없어서 못 고쳤대요. 그러다 이곳에 오면 고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나를 찾아왔어요. 이곳 저곳 기름도 치고, 까맣게 녹이 슨 건전지박스랑 스위치도 정성스럽게 갈고. 그렇게 일주일을 씨름했어요. 낡은 라디오에서 치지직 소리가 다시 들리는데, 그분 얼굴에 스치던 그 벅찬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표정 때문에 하는 거예요.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추억을 다시 살려냈을 때의 뿌듯함 때문에.” 세운상가 가동 3층에서 ‘차전자’를 운영하는 차광수(61) 장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들려준 의뢰인 사연이다.

차광수 장인뿐 아니라, 수리한 물건에 담긴 사연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조합 장인들 눈은 한결같이 보람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예전에는 아무도 우리를 제대로 취급해주지 않았어요. 다들 ‘쟁이’라고 불렀지. 이제는 ‘장인’이라고 부르면서 대접해 줘요. 우리가 고치는 물건이 달라진 게 아니에요. 오래된 물건, 고쳐야 하는 물건의 가치가 달라진 거지. 그게 우리 자부심이에요.”

이승근 장인이 다짐하듯 말했다. “모든 걸 고칠 수 있다고는 자부 못 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고쳐드려요. 그러니 주저 말고 사연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소중한 추억을 다시 살려드립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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