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공 노부부 바람 따라
대청봉ㆍ울산바위 보이게 설계
싱크대 상판 재료를 외장재로
‘영원한 흰색’ 유지에 도전
풍광 해치는 넓은 정원 대신
동서남북으로 작은 뜰 만들어
강원 고성군 인흥면 풍곡길은 바람 길목이다. 택시를 타면 기사로부터 기왓장이 바람에 날아간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난해 이곳에 지어진 노부부의 별장 ‘인 화이트’는 입을 다문 집이다. 서쪽으로 설악산 대청봉과 울산바위가 펼쳐지고, 위로는 시시각각 빛을 달리하는 하늘이, 옆으로는 산에서 내려치는 바람이 천지를 진동하는 곳에서 집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건축주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같은 집”을 지어달라고 말했다.
영원한 흰색에 도전하다
건축주 부부는 둘 다 미술 전공이다. 연애 시절부터 설악산을 즐겨 오르던 두 사람은 노후를 보낼 곳으로 대청봉과 울산바위가 내다보이는 바람 길목을 택했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남편은 붓글씨를 쓰고 싶어했고, 응용미술을 전공한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땅을 찾은 임우진ㆍ곽윤석 아으베 아키텍처스 소장은 울긋불긋한 설악의 절경 위로 펼쳐지는 새파란 창공을 보고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빛과 색이 이렇게 풍성한데 거기 또 다른 색을 더하는 건 무의미한 대결이죠. 여기서 내가 힘을 주면 자연에 박살이 나든지 저 풍광을 해치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집의 색깔은 더 논의 없이 흰색으로 결정됐다.
하얀 집을 짓는 건 어렵지 않다. 최근 지어지는 많은 집이 백색의 스터코(소석회에 대리석 가루와 찰흙을 섞은 외장재)로 깔끔한 외관을 자랑한다. 문제는 어떻게 유지할 것인 가다. 외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필연적으로 ‘땟국물’을 남긴다. 저렴하게 마감한 뒤 몇 년 주기로 칠을 해도 되지만 임 소장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극단적인 자연 풍광이 그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건축가는 ‘영원한 흰색’에 도전하기로 했다.
“오염의 주원인은 외벽에 가로로 난 틈새입니다. 여기에 고인 빗물과 먼지가 흘러내려 얼룩을 만들죠. 저희는 외벽에 가로 줄눈을 전부 없애기로 했습니다.”
외장재로 택한 하이막스는 싱크대 상판에 주로 사용되는 재료다. 김치국물이 묻어도 벌건 자국을 남기지 않고 화기에도 강하다. 패널을 이어 붙여 얼마든지 원하는 크기로 늘릴 수도 있다. 건축가는 지붕 각도를 60도로 가파르게 잡은 뒤 패널을 길게 이어서 벽돌 구조체 위에 붙여 나갔다. 지붕에 떨어진 빗물은 고일 틈 없이 흘러내려 지붕과 벽체 사이에 미세하게 낸 틈 사이로 빠져 나간다.
“전통적인 시공방식에서 빗물은 외벽을 타고 흐르게 마련이죠. 그 통념을 깨고 싶었습니다. 지붕과 벽체 사이 1㎝ 가량의 틈을 내 그 안으로 물길을 새로 만든 거예요.” 처음 외장재를 붙이고 세 번의 겨울을 났지만 순백의 실험은 현재까진 성공적이다.
여백에 대한 집착은 바깥 마당으로도 이어진다. 건축가는 땅 한가운데 집을 앉혀, 너른 정원 대신 동서남북 사방에 작은 정원이 생기게 했다. 길쪽에서 보이는 앞 마당엔 꽃과 나무 대신 갈대를 심었다. 기껏 만든 흰 화폭 위에 섣불리 화려한 그림을 얹고 싶지 않아서다.
앞마당의 갈대가 조용히 흔들리며 빛과 바람의 존재만을 알린다면, 뒷마당은 화려한 꽃들로 색채가 폭발하는 ‘비밀의 정원’이다. 건축가는 눈 앞의 설악이 “보기 위한 풍경”이라면 꽃이 심긴 뒷마당은 “걷고, 만지기 위한 풍경”이라고 했다. “봄에 이곳은 아주 요란해집니다. 전원주택에 살면 단조로움과 외로움을 느끼기 쉬워요. 가능하면 사방의 정원을 모두 다른 느낌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순백의 공간 위해.. 창도 최소화
‘인 화이트’를 탄생시킨 대청봉과 울산바위를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곳은 2층이다. 건축가는 집의 서쪽에 자리한 설악산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1층은 남향으로, 2층은 방향을 30도 가량 틀어 서향으로 만들었다. 납작한 몸체 위에 하얗고 두꺼운 삼각형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은 이렇게 나왔다. 여름에 하루 종일 머무는 서향볕이 실내를 달굴까 봐, 창을 안으로 들이면서 현재의 외관이 완성됐다.
침실, 주방, 거실이 있는 1층이 흰색의 아늑한 생활 공간이라면, 2층은 깎아지른 삼각형 지붕으로 둘러싸인 숨 막히는 백색의 공간이다. 건축가는 천장에 석고나 베니어합판 대신 스트레칭 실링이라는 특수한 소재를 사용했다. 비닐과 비슷한 탄성 있는 소재로, 사방에서 잡아 당기면 벽처럼 판판하게 펴진다. 흠 하나 없는 ‘백지’처럼 보이기 위해 선택한 재료다.
순백을 방해하는 ‘흠’에는 바깥 풍경도 포함된다. 길거리의 작은 나무도 풍경으로 추대하는 도시와 달리, 지천이 절경인 이곳에선 풍경을 선별할 필요가 있었다. 건축가는 정면의 삼각 창문과 남쪽 발코니의 창문을 제외하고 2층에 창을 최소화했다. 박공지붕에 흔하게 낸다는 천창도 없다.
“대청봉과 울산바위라는 대단한 풍경이 있는데 여기저기 창이 들어가면 그 순수함이 깨져 버리죠. 처음 여기 하늘과 설악산을 봤을 때 이 정도로 극단적인 미니멀함이 아니면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쪽에 창을 낸 건 여기로 멀리 속초 시내가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주거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집이라 눈으로라도 삶의 복닥거림을 느끼기 바랐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주방재를 외장재로 쓰고 천장에 패브릭을 사용한 것 외에도 ‘인 화이트’에는 국내 시공방식에서 벗어난 시도들이 많다. 자재도 대부분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비싼 고급 자재가 아니라 국내와 가격은 비슷하면서 표현은 더 효과적인 자재들”이라는 설명이다. “국내 건축이 틀에 박히는 이유 중 하나가 시공방식과 자재에 변화를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흰색은 유지될 수 없다는 통념도 마찬가지에요. 필요에 따라 언제든 틀을 깨는 건축을 하고 싶습니다.”
고성=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