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총사’의 호색한 포르토스 역할
10주년 공연에선 캐릭터 바뀌어
‘맨 오브 라만차’ ‘닥터 지바고’는
여주인공 성폭력ㆍ추행 장면 수정
초연 ‘레드북’ ‘아홉소녀들’ 등
여성ㆍ소수자 앞세운 작품도 속속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관객들이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도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어요. 마초 캐릭터인 포르토스를 변화시킨 이유예요. 호색한 남자 대신 겉으로는 우악스럽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연약함을 강조하는 걸로도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뮤지컬 ‘삼총사’의 왕용범 연출가)
초연 10주년을 기념해 지난 16일부터 공연 중인 ‘삼총사’는 2009년 첫 공연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제다. 시간의 풍화에 견뎌 낸 듯한 이 뮤지컬도 몇 가지가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캐릭터다. 왕용범 연출가는 “사회적으로 남성이라는 권력의 행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 것 같다”며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놓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공연에서도 더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캐릭터 변화가 ‘미투(#MeToo)’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 전반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미투 운동이 무대 위 작품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성별 역할과 남녀관계에 대한 관객과 배우 등의 인식이 바뀌면서 공연 작품의 내용도 변하고 있다. 공연장 작업환경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수동적, 피해자 여성 캐릭터는 그만
오랜 기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 온 작품들도 시대 흐름에 발을 맞추고 있다. 내용 전개를 위한다는 이유로 성폭력을 강조하거나 왜곡된 성 고정관념을 담고 있던 이야기들이 바뀌고 있다. 변화의 원동력은 관객들이다. 예전과 다른 시각을 지닌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제작사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음달부터 3년 만에 재공연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대표적이다. ’맨 오브 라만차’에는 여자 주인공 알돈자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제작사 오디컴퍼니는 재공연에선 이 장면을 수정할 계획이다. 오디컴퍼니 측은 “알돈자를 극한 좌절로 몰아넣는 장면이었으나 오랫동안 불편하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해당 장면의 수정을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다. ‘맨 오브 라만차’는 2005년 국내 초연된 이래 인기 뮤지컬로 자리 잡은 작품이다. 공연 중인 뮤지컬 ‘닥터 지바고’도 장면 하나를 고쳤다. 극중 부패한 고위 법관 코마로프스키가 여주인공 라라의 신체를 쓰다듬는 모습 등에 대한 관객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프리뷰 기간 중 장면을 수정했다.
여자 주인공에 대한 성폭력은 ‘시련’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여성 캐릭터를 피해자이거나 수동적인 인물로 전형화한다는 지적이 계속 돼 왔다. 특히 해외 뮤지컬마저도 한국에서 공연되면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최근 들어 ‘전형성’을 탈피한 캐릭터를 선보이고자 하는 작품들이 더욱 눈에 띄는 이유다. 이달 30일까지 공연되는 창작 뮤지컬 ‘레드북’은 보수적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써 잡지까지 내는 주체적 여성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안나는 문학계 권력자인 평론가가 자신을 추행하려 하자 그를 걷어 차, 관객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었다.
공연계에 등장한 새로운 시각
미투 운동은 단순한 고발을 넘어 위계와 권력에 의한 억압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소수자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의 잇단 공연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극단 프랑코포니가 제작한 ‘아홉소녀들’은 9명의 소녀들이 놀이를 통해 성폭력, 비만, 동성애, 이주민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을 이야기한다. 극단 LAS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줄리엣과 줄리엣’을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극단 여행자는 다음달 독일 하이델베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의 성별을 여성으로 전환했다. 두 작품 다 고전을 새롭게 단장해 여자와 여자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다. 이기쁨 극단 LAS 대표 겸 연극연출가는 “원수인 가문의 자제들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과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사랑에 장벽이 생긴 소수자들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밝혔다.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 겸 연극연출가는 “(같은 주제를 내세운 작품이 나온 것은)이런 고민을 함께 하는 극단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반갑다”고 말했다.
6월에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열린다. 페미니즘 연극제를 준비 중인 나희경 페미씨어터 대표는 “(작품 속에서)왜 여성 캐릭터는 엄마 아니면 나쁜 여자인지, 심지어 그들은 왜 주인공이 아닌지, 성소수자는 왜 불행하게 그려지는지 고민을 계속 해 나가기 위해 축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작품 공모를 해 9개 작품이 선정됐다.
창작진에 싹트는 변화
미투 운동은 제작진의 작품 준비 과정에 영향을 줬다. 이기쁨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미투’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단원들이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확실히 많아졌다”며 “무대 위의 표현, 제작진의 방향이 맞는지를 훨씬 신중하게 고민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창작 과정의 변화에 관객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연극계에서 미투 폭로가 이어질 때 관객들은 대학로에서 집회를 열고 미투 가해자가 연루된 공연 관람을 거부하는 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왔다. 뮤지컬계 한 관계자는 “제작진이 특정 장면이 불편하다는 관객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제작진도 (시대에 맞춰)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투로 촉발된 변화는 장기적으로 더 큰 물결로 나타날 전망이다. 공연은 대본 작성과 무대 연습 등을 거쳐 관객을 만나기까지 오래 시간이 걸린다. 그만큼 작품들이 미투 운동의 영향을 아직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김명화 연극평론가는 “미투 현상이 문화계 내부 깊숙이 침투해 더 넓게 반영되려면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 본다”며 “페미니즘 연극 페스티벌이 열리는 시기가 되면 (이와 관련한) 본격적인 작품이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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