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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음용 활성탄

입력
2018.03.25 13:3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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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으로 특이한 응급실 의약품을 하나 소개한다. 정식으로 약효가 입증되었지만, 응급실 처방약 중 거의 유일하게 누구나 제조할 수 있고, 길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음식점이지만 맛이 없어 아무도 먹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것으로 이를 닦거나 피부에 바르는데, 검은색이라 보기에는 안 좋지만 효과는 있다. 응급실에서는 매우 중해서 실제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환자에게만 쓴다. 식품으로 판매하면 불법이고, 허가는 의약품으로만 되어 있다.

바로 활성탄(Activated charcoal)이다. 우리가 아는 그 검은 숯이 맞다. WHO에서 승인을 받은 엄연한 약제다. 의학 교과서는 제조법을 이렇게 기술한다. '나무를 처음 500도 정도로 열분해시키고, 다음 단계로 이산화탄소 또는 증기를 주입하면서 다시 1,000도 정도의 온도로 가열하여 만든다.’ 가끔 티브이에 장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가마에서 나무를 굽는 그 장면이다.

활성탄은 말 그대로 순수한 활성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활성 탄소는 유기물을 화학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1,000도의 가열 과정에서 숯은 활성화 단계를 거치면서 미세구멍(Micropore)을 갖게 된다. 이 구멍은 엄청나게 넓은 표면적을 만든다. 이로써 흡착력이 매우 강해지고, 미세구멍 내 박테리아 번식이 유기물의 산화 분해를 돕는 작용을 한다. 이 과정으로 늘어난 면적은 어마어마한데, 숯 1g의 표면적이 어림잡아 1,000㎡(300평)이나 될 정도다.

이런 특성으로 활성탄은 환자의 독성 물질을 흡수하는 데 사용된다. 게다가 활성탄은 장내에 들어있는 소화물의 독성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장에 직접 붙어 모세혈관 내부의 독성까지 빨아들인다. 독성 물질을 음독했을 때 거의 유일한 치료제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이 치료 이론만 있었을 때, 한 학자가 자신의 몸으로 입증해서 의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프랑스인 P.F. Touery는 1831년 당시 최고의 맹독으로 알려진 스트리크닌의 치사량 10배를 활성탄에 타서 먹고 별다른 고통 없이 멀쩡히 살아났다. 이로써 인류는 치료약을 하나 얻었고, 그는 생명을 무탈히 연장했으며, 지금 이 글에도 언급되고 있다.

활성탄의 치료 범위는 매우 넓다. 사람이 음독하는 독성 물질 중에, 철, 리튬, 납 같은 금속이나 시안화물, 알코올류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효과가 있다. 의학 교과서는 이렇게 말한다. "활성탄이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써라."

하지만 활성탄을 먹기는 당연히 어렵고, 미적으로 그리 아름답지도 않다. 음독의 95% 이상은 자살시도다. 환자가 내원하면 일단 빠른 시간 내에 물에 갠 활성탄을 처방하는데, 자살하려던 사람에게 숯가루를 탄 걸쭉하고 검은 액체를 권하니 당연히 잘 안 먹으려고 한다. 안 먹으면 영구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 대부분 먹는다. 콧줄을 끼워 위에 직접 주입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맛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한번 복용하기 시작하면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데, 만약 구토하면 같은 양을 추가로 처방한다.

반면 숯을 식품으로 판매하면 불법이다. 복용의 부작용은 거의 없지만, 유기물질의 흡수력이 너무 뛰어나 피임약과 같이 복용하면 임신할 수 있을 정도다. 장복하면 소화장애나 물리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불법으로 제작해서 팔다가 적발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활성탄은 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약이다. 그러니 이제 고깃집에서 불타는 숯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 약효를 한 번씩 떠올릴 수 있겠다. 무엇보다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의사로서, 지금부턴 아무도 응급실에서 이 검고 걸쭉한 액체를 떠놓고 맛을 보는 일이 없기를 희망한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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