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난데없이 담뱃값이 2,000원 올랐다. 겨울에는 추워서 연인과 사랑도 못 나누는 허름한 방의 월세도 5만원이나 더 달란다. 가사도우미 일당 4만5,000원을 쪼개고 또 쪼개도 도무지 수지가 안 맞는다. 담배 한 모금과 위스키 한 잔, 사랑하는 남자친구 말고는 바라는 게 없는 가난한 삶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과감히 짐을 쌌다. 담배도, 위스키도, 남자친구도 포기할 수 없으니 집을 버린다.
영화 ‘소공녀’(상영 중)의 주인공 미소(이솜)는 포기할 게 너무 많은 N포 세대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 기준과 라이프 스타일을 가졌다. 현실감과 판타지가 공존한다. 배우 이솜(28)의 독특한 개성과 당당한 태도가 녹아 있어 묘하게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서울 명동의 한 영화관에서 마주한 이솜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자신만의 취향 하나쯤은 지키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냐는 응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 시선에서 미소를 바라보면 ‘왜 그런 선택을 할까’ 질문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질문하는 대신 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커다란 여행 가방과 작은 배낭에 인생을 차곡차곡 담아 집을 나온 미소는 대학 시절 록밴드 동아리 친구들을 찾아가 하룻밤 재워달라 청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삶도 녹록치는 않다. 링거 맞으며 일하는 친구, 시집살이 하면서 아등바등 사는 친구, 20년 상환 대출로 집을 샀지만 이혼 당한 친구,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만 남편 눈치 살피는 친구 등 저마다 애환을 갖고 산다. “미소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소의 눈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또 따뜻하게 위로해 줘야 하니까요. 무엇이 가장 큰 위로일까 고민을 했는데요. 친구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더라고요. 비록 연기이지만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 했어요.”
이솜은 미소의 의상을 입은 채로 촬영장에 출퇴근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운전해 다녔다. “촬영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하고 촬영 때 제 옷을 입기도 했으니까, 특별한 보살핌도 필요 없었죠. 매니저 분들이 걱정했지만, 촬영장에 절대 오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런데 한번은 소속사 선배인 이정재 선배가 촬영장에 깜짝 방문했어요. 스태프들이 화들짝 놀라더라고요(웃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을 돌보면서 영화 한 편을 오롯이 책임진 경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이솜은 “‘소공녀’를 촬영하면서 큰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배우가 얼마나 애정을 쏟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좋아하는 영화에 참여해서 그 애정이 더 잘 담긴 것 같기도 해요. 또 하나, 제가 촬영장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죠.”
‘소공녀’는 요즘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여성영화다. 이솜은 “운이 좋아서 좋은 캐릭터를 만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이솜의 지난 선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영화 ‘마담 뺑덕’과 ‘범죄의 여왕’,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등에서 자기주도적인 여성상을 그렸다. 이솜은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기다려 온 관객에게 ‘소공녀’가 반갑게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솜도 ‘소공녀’의 미소 못지않게 주체적이다. 감독과 제작자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기회를 찾아 나섰다. ‘소공녀’에서 함께 연기한 배우 안재홍이 출연했던 영화 ‘족구왕’을 본 뒤, 그 영화를 제작한 영화창작집단 광화문 시네마의 문을 두드렸다. 광화문 시네마가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던 ‘범죄의 여왕’ 시나리오를 구해 읽고는 “작은 역할이라도 좋으니 참여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그렇게 ‘범죄의 여왕’에 출연했고, ‘범죄의 여왕’ 이요섭 감독의 아내인 전고운 감독의 데뷔작 ‘소공녀’에선 주인공을 맡게 됐다. 이솜은 “‘범죄의 여왕’ 에필로그에 실린 ‘소공녀’ 예고영상을 봤을 때부터 많이 기대했던 작품”이라고 생긋 웃었다.
이솜은 모델로 데뷔해 2010년 독립영화 ‘맛있는 인생’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연기 경력이 어느새 8년이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왔다. 요즘엔 연기 레슨을 받고 있다고 한다. “3개월 정도 됐어요. 소속사에서 연기 레슨을 개설해서 소속 배우 누구나 배울 수 있게 했거든요.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 건 처음인데 진짜 좋은 훈련이 되더라고요.”
이솜은 “서른 살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돌이켜보니 저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30대가 됐을 때 20대의 시간들이 후회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계속 새로움에 도전하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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