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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필리핀 두테르테 정권, ‘좌파 겨냥’ 암살 명단 만들었나

입력
2018.03.23 17: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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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평화협상 중단 이후

600여명 이름 담긴 문서 제출

법원에 테러리스트 공식지정 요청

#2

공산반군은 물론 진보인사도 포함

인권단체 “암살 대상자 명단과 마찬가지”

21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의 탄압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두테르테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활용, 그를 처형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날 시위대는 민다나오 섬 전역에 선포된 계엄령 해제, 공산반군인 ‘신인민군(NPA)’의 테러리스트 지정 추진 중단 등을 요구하면서 “젊은이들은 NPA에 합류해 달라”고 호소했다. 마닐라=EPA 연합뉴스
21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의 탄압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두테르테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활용, 그를 처형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날 시위대는 민다나오 섬 전역에 선포된 계엄령 해제, 공산반군인 ‘신인민군(NPA)’의 테러리스트 지정 추진 중단 등을 요구하면서 “젊은이들은 NPA에 합류해 달라”고 호소했다. 마닐라=EPA 연합뉴스

지난달 21일 필리핀 법무부는 600여명의 이름이 담긴 55쪽 분량 문서를 마닐라 사실심 법원에 제출했다. 명단에 오른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공식 지정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필리핀의 대안언론 ‘불라랏닷컴’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필리핀 공산당(CPP)과 당의 군사조직 신인민군(NPA)은 물론 실명 461개와 가명 188개가 빼곡히 적혀 있다. 진보적 인사, 인권운동가, 전 카톨릭 신부, 어민 4명, 농민 5명, 10명 이상의 ‘필리핀 원주민’(Indigenous people) 등이 포함돼 있다. 심지어 현재 유엔의 ‘원주민 인권 특별 보고관’을 맡고 있는 빅토리아 톨리-코르푸즈도 명단에 있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원주민 커뮤티니 인권문제를 오랫동안 다뤄 온 인권운동가다. 그런 그에게 법무부는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인 것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즉각 “암살 대상자 명단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HRW의 필리핀 조사관 카를로스 콘드는 이 명단이 법무부와 대통령궁 간 협의를 거친 결과물이라고 봤다. 그는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과거 정부가 ‘정권의 적들’ 같은 명단과 함께 ‘전투 명령’을 내리면 거론된 이들 다수가 결국 살해당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테러리스트 명단’ 사태는 필리핀 정부와 공산반군간 평화협상의 결렬에서 비롯됐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공산반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맹비난한 데 이어, 지난 1월 말에는 “공산주의자편에 선 좌파진영이 다음 타깃”이라면서 “법적 전선으로 이동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리고 곧바로 법무부의 ‘테러리스트 명단’이 나왔다.

필리핀은 세계 최장기 좌익 무장투쟁이 벌어지는 나라다. 1968년 12월 26일 좌파 지식인 호세 마리아 시손은 동료들과 함께 CPP를 창당했다. 이듬해 3월 브레나베 부스케이노를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당내 군사국인 NPA도 창설됐다. 그리고는 1971년 첫 공격 개시와 함께 마오주의자 공산반군의 무장투쟁이 본격화됐다. 2년 후에는 CPP의 정치국과 군사국을 아우르는 전위조직 ‘민족민주전선(NDF)’을 출범시켜 대중 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 결과 당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1972년 9월) 이전까지만 해도 10여개 소총만으로 싸우는 데 불과했던 반군은 1986년 마르코스 정권 말기에 이르러 2만 5,000명의 전투대원을 보유한 무장반군조직으로 성장했다. 계엄 치하의 독재정치가 오히려 공산반군의 몸집을 키웠다는 게 보편적 분석이다. 이후 1986년 ‘피플 파워(시민의 힘)’에 힘입어 출범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정부 시절부터 최근까지 필리핀 정부와 공산반군 간에는 총 40차례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7월20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의 마라위 지역 인근 정부군 캠프를 시찰하고 있다. 당시 정부군은 이 곳에서 이슬람국가(IS) 추종 극단주의 세력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진행 중이었는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IS 무장세력과의 전투가 끝나면 공산반군 소탕에 나설 것이다. 신인민군(NPA)과의 평화협상에 더 이상 관심 없다”고 밝혔다. 마라위=로이터 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7월20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의 마라위 지역 인근 정부군 캠프를 시찰하고 있다. 당시 정부군은 이 곳에서 이슬람국가(IS) 추종 극단주의 세력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진행 중이었는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IS 무장세력과의 전투가 끝나면 공산반군 소탕에 나설 것이다. 신인민군(NPA)과의 평화협상에 더 이상 관심 없다”고 밝혔다. 마라위=로이터 연합뉴스

두테르테 정부와의 협상이 본격적으로 어긋난 건 지난해 5월 말부터다. 2017년 5월23일 남부 소도시 마라위 지역에 출현한 이슬람국가(IS) 추종 극단주의 세력을 겨냥, 정부는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민다나오 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자 공산반군 지도부는 “(계엄령을 거부하고)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는 ‘휴전 위반’이라면서 반발했다. 이는 4일 뒤 노르웨이에서 열린 협상 테이블에서의 충돌로 이어졌고, 같은 해 11월 23일 두테르테 대통령이 공산당과의 평화협상 전면 중단을 공식화하는 대통령령 360호에 서명하면서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평화협상 결렬, ‘테러리스트 명단’ 사태로 가장 우려가 큰 이들은 루마드(Lumad) 커뮤니티다. 남부에 집중 거주하는 원주민 루마드 부족은 NPA 대원의 70%를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8일 군 본부인 ‘캠프 아퀴날도’에서 루마드인들이 벌인 ‘CPPㆍNPA의 테러리스트 등재 반대’ 시위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위대는 정부 조치가 결국 루마드 커뮤니티를 향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 동안 정부군의 대공산반군 작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필리핀 공산당(CPP)의 군사조직인 신인민군(NPA) 대원들의 훈련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필리핀 공산당(CPP)의 군사조직인 신인민군(NPA) 대원들의 훈련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NPA 또한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일부 루마드 커뮤니티에 대해선 폭력적으로 응대해 왔다. 지난해 12월17일 NPA에 협조를 거부한 루마드 마을 지도자 다투 베난다오 모간(당시 59세)이 살해된 사건은 단적인 예다. 이러한 ‘틈새’는 필리핀 정부에겐 좋은 기회다. 정부는 그 동안 투항한 루마드를 이른바 ‘시민군(CAFGU)’으로 불리는 민병대로 포섭, 대(對) 반군 작전에 이용해 왔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고향 다바오시 방문길에 “루마드를 3개월간 군사훈련을 시켜 NPA를 상대하는 작전에 투입했으면 한다”고 말한 것은 노골적인 포섭 노력이었다. 심지어 그는 “루마드가 NPA 대원 한 명을 죽일 때마다 2만 페소(약 41만원)를 보상하겠다”면서 ‘현상금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달 16일 중부 비콜 지역 나가시티에서 NPA 간부 알프레도 메릴레스가 숨진 것과 관련, 정부와 공산반군 양측은 엇갈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정부군은 메릴레스가 군과 경찰의 목숨을 먼저 위협했고,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반면 반군 진영에선 이를 전면 부인하는 입장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 방문길에 있던 그는 당시 비무장 상태였고, 따라서 ‘교전 중 사망’이라는 정부 설명은 가짜 뉴스라는 것이다. 이들은 묻고 있다. “현장에서 제9보병대가 메릴레스의 신원을 ‘카 오웬’이라는 가명으로 확인 했다고 한다. 카 오웬은 누구인가? 혹시 600명 테러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가명 중 하나인 건 아닌가?”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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