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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나무는… 작가를 자극하고 몽상하게 하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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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나무는… 작가를 자극하고 몽상하게 하는 상상력이다

입력
2018.03.23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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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우찬제 교수

소설가ㆍ시인ㆍ화가의 작품서

봄~겨울로 시간을 나누어

나무의 문학적 의미 풀어내

경기 양평군 두물머리의 세미원에서 해가 뜨는 장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닮았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책에서 세한도가 문학 작품의 소재로 끊임없이 쓰이는 것을 '세한도 현상'이라 불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기 양평군 두물머리의 세미원에서 해가 뜨는 장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닮았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책에서 세한도가 문학 작품의 소재로 끊임없이 쓰이는 것을 '세한도 현상'이라 불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상상력은 나무다, 나무는 상상력이다.”

책은 이 문장을 촘촘하게 증명한다. 문학평론가인 우찬제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의 ‘나무의 수사학’(문학과지성사). “작가의 감각을 자극하고 몽상하게 하는 존재”인 한국 현대문학 속 나무가 주인공이다. 지혜, 순환, 헌신, 그리움, 꿈, 시간, 우주… 나무는 그 모두의 상징이다. 문학은 나무의 수액을 빨아들여 풍성해진다.

“나무는/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천 년의 강물이다”(이형기 시인의 시 ‘나무’ 부분) 나무의 문학성은 해마다 다시 시작하는 나무의 생에서 나온다. 단 한 번 살고 가는 인간은 나무의 삶에서 신화를 짓고 철리를 발견한다. 저자가 나무 책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1999년 캐나다에서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와 마주쳤을 때였다. 밑동만 남은 죽은 소나무에서 자라난 새 소나무에서 생명의 멋진 찬가를 들었다고 한다.

나무의 시간에 주목한 저자는 봄(생명) 여름(욕망) 가을(상처) 겨울(치유)로 나누어 나무의 의미를 풀어낸다. 소설가 황순원부터 김애란까지, 시인 정현종부터 이우성까지, 추사 김정희와 화가 김선두까지,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한국문학 연구서’로 나온 만큼 읽는 데 수고가 드는 글이지만, 나무, 문학 중 하나라도 좋아한다면 수고에 값할 것이다.

나무의 수사학

우찬제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423쪽∙2만8,000원

“봄날 나무를 마주하고 꿈꾸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자크 브로스 ‘나무의 신화’) 새순 돋는 나무는 또 한 번의 생명을 약속하므로 설렌다. 타는 목마름으로 현실과 싸운 김지하 시인은 나무의 생명력에서 ‘죽임’의 반대말인 ‘살림’의 희망을 찾아낸다. “내가 타 죽은/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나는 죽어서/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줄탁’ 부분) 생명의 황홀경에 취한 정현종 시인은 나무와 하나가 되어 사람 한 그루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나는/너희와 체온이 통하고/숨이 통해/내 몸에도 문득/수액이 오른다”(‘나무껍질을 기리는 노래’ 부분)

무섭게 자라는 여름 나무는 때로 변신을 향한 괴이한 욕망을 상징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내 여자의 열매’는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삶이 버거워 식물이 되고 싶어하는 이의 이야기다. “아내는 베란다 쇠창살을 향하여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만세 부르듯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진초록색이었다. 푸르스름하던 얼굴은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다.”

'나무의 수사학'의 저자 우찬제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과지성사 제공
'나무의 수사학'의 저자 우찬제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과지성사 제공

가을이 너그러운 계절인 건, “살덩이인” 잎과 열매를 아낌없이 풀어놓는 나무 덕분이다. 나무는 언제나 더 지극하게 품고 더 넉넉하게 내주고 싶어 한다. “올해는 힘이 없어서 그 아이들을 떨어뜨렸지만 내년에는 절대 그런 아픔을 겪지 않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깊게 뿌리를 내려야지. 더 곧게 줄기를 뻗고, 더 많은 잎을 피워야지.”(이순원 작가의 소설 ‘나무’) “순식간에 높다란 나무 꼭대기 위에 새로운 장대하고도 찬란한 황금빛 기둥을 세웠는가 하자, 무수한 잎을 산산이 흩뿌려놓았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장엄한 흩어짐이었다.”(황순원 작가의 소설 ‘나무와 돌, 그리고’)

겨울의 나목은 봄이 올 것을 믿고 다만 묵묵히 기다린다. 그래서 죽음이 아닌 재생의 나무다. 삭풍에 흔들리는 맨몸의 나무에서 치유와 성숙의 가망을 찾는 건 보는 이의 마음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 속 주인공이 그렇다. 고목인 줄 알았던 나무 그림이 나목이었음을 긴 삶을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목이 한국 문학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건, 우리가 ‘믿음’으로만 견딜 수 있는 신산한 오늘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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