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해녀 오희춘 할머니 16세 때
“육지서 물질할 기회” 거짓말 속아
남로당 가입 문서에 덜컥 지장
징역1년 선고 받고 복역 후 귀향
#2
4ㆍ3 당시 16세이던 현창용씨
“새벽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인민군 복역하다 붙잡혀 20년형”
#3
18명 재심 청구 힘겨운 투쟁
재판 관련 기록 끝내 못 찾아
“동백꽃이 질 때 보면 다른 꽃과 달라. 한 잎 한 잎 떨어지질 않고 한 번에 봉오리째 뚝 떨어져. 꽃봉오리 같던 나이에 형무소를 다녀와 기도 못 펴고 져버린 내 인생이 동백꽃이야.”
제주도 서귀포시 하효동에서 태어난 오희춘(85) 할머니의 어머니는 해녀였다. 일본 대마도에서 물질을 하던 어머니는 대상군 다음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유한 상군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끌려 오 할머니도 어려서부터 물질을 배웠다. 1945년 광복 무렵 한글도 배우지 못한 채 학교를 중퇴한 그에게 집과 밭, 바다가 세상의 전부였다.
1947년 어느 날. 당시 열네살인 할머니에게 “육지에서 물질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며 동네 주민 오희진씨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단짝 김정추(86)씨와 할머니는 별 다른 의심없이 종이에 적힌 이름 옆에 지장을 찍었고, 이는 오 할머니를 평생 제주 4ㆍ3사건의 죄인으로 옭아맨 덫이 되고 말았다.
육지에서 물질하러 오라 부를 날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오 할머니는 ‘이때라도 눈치를 채 몸을 피했다면 어땠을까’라고 수없이 후회했다. 1948년 10월 그를 기다리는 것은 육지에서의 새로운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해녀를 모집했던 종이가 알고보니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가입문서였던 거야.” 오씨가 내민 종이에 언변이 좋았던 친구 정추는 선전부장으로, 오 할머니는 조직부장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 졸지에 오 할머니는 남로당 가입문서에 지장을 찍은 셈이 됐다.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되고 보니 이미 유치장에 갇혀있던 오씨는 두 사람을 속인 사실을 인정했고, 오 할머니도 이내 오해가 풀릴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할머니는 제주시로 이송돼 당시 관덕정 옆에 있던 제주지방법원에서 군법회의를 거쳐 전주 형무소로 보내졌다. 오 할머니는 형무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 할머니의 부모도 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오 할머니는 “내가 죽은 줄 알고 부모님이 군 토벌대가 주민들을 총살시키던 정방폭포 아래 쌓여있던 시신들을 뒤지며 나를 찾아 다녔다고 한참 후에야 동네 사람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영문모를 10개월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할머니는 ‘처녀가 육지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왔다’는 게 너무나 창피했다. 할머니는 얼마 후 자신의 사연을 아는 이웃 부락 남자와 결혼했고 9남매를 낳아 길렀다. 남편이 한국전쟁에서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58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부부는 4ㆍ3사건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억울함도 70년 세월에 묻어뒀던 오 할머니가 끝내 입을 연 것은 2016년 4ㆍ3도민연대를 통해 다른 4ㆍ3 사건 수형 희생자들을 만나면서다. 이들과 함께 무죄를 증명해줄 재심 신청을 결심한 오 할머니는 지난해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자신이 4ㆍ3 수형희생자였음을 알렸다. “어머니가 어떻게 4ㆍ3에 가담이 됐수꽈?” 60대의 아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 할머니는 이제야 자식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하니 조금은 후련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말한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이때까지 억울한 마음을 오므리고 살았어. 그 세월을 누가 알아주나”라고.
제주도 제주시 노형동에 사는 현창용(86) 할아버지는 1948년 9월의 어느 새벽 홀어머니와 살던 작은방에 서북청년단(이북출신 극우청년단체)이 들이닥친 풍경을 70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허드렛일을 하던 열여섯 소년은 서북청년단원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마당에는 청년 7,8명의 무릎이 꿇려 있었고, 총을 든 경찰도 10여명이나 둘러싸고 있었다.
인근 초등학교로 끌려간 현 할아버지는 말 못할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경찰들은 현 할아버지에게 “산으로 올라간 폭도와 연락했냐, 삐라를 뿌렸냐”고 다그쳤다. 부인하면 가혹한 고문이 쏟아졌다. 현 할아버지는 “경찰들이 50차례, 100여 차례씩 두들겨 패서 퍼렇게 멍이 들고 등이 거북이 등마냥 쩍쩍 갈라졌다”고 회상하며 몸서리쳤다. 물고문을 받아 막판엔 까무러쳐 의식을 놓았던 할아버지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경찰이 내민 혐의를 인정하는 종이에 지장을 찍고 말았다.
유치장에서 도는 흉흉한 소식은 공포를 더욱 키웠다. 미군정 경무부장이자 4ㆍ3 당시 제주에 서북청년단을 보냈던 조병옥이 “제주 사람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4ㆍ3 진압을 위해서 다 죽여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8년 12월 8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는 200여명이 한꺼번에 선고를 받았다. 현 할아버지는 “단체변호를 맡은 군복 입은 변호사가 변론으로 ‘죄는 있지만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딱 한 마디만 한 것이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끌려온 사람들에게 소명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은 채 재판은 15분만에 끝났다. 다음날 현 할아버지는 목포항을 거쳐 소년범을 수용하는 인천형무소로 갔다. 여기서야 현 할아버지는 자신이 5년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다.
현 할아버지의 삶은 인천형무소에서 한국전쟁을 맞으며 다시 격랑에 휩쓸렸다. 1950년 6월 말, 간수들이 도망가고 난 형무소 문이 열렸다. 감방을 나온 할아버지와 수형인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수원까지 걸어갔다가 군인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다시 인천형무소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7월엔 북한 인민군이 인천을 점령하며 형무소를 나오게 됐다.
서울로 끌려간 현 할아버지는 심사를 받고 이번엔 인민군이 됐다. 할아버지는 “용산에서 폭격이 쏟아지고 거리엔 시신이 즐비했다. 집에 간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으로 가 약 20일간 군관학교에 다니며 교육도 받았다. 결국 현 할아버지는 남한으로 보내졌다가 지리산 자락에서 붙잡혔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으로 감형이 됐다. 1973년 만기출소. 영문도 모른 채 새벽에 끌려나갔던 소년은 25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현 할아버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간 제주지방법원, 경찰서, 군까지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재판과 관련된 판결문과 공판조서 등 기록이 없었다. 그는 “70년 세월 동안 옥살이와 여러 고통을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했다.
1948년 제주 4ㆍ3 사건 당시 군사재판을 통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수형희생자들의 사연은 70여년 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들이 내란죄 등 혐의로 미군정의 군법회의를 통해 최소 1년~최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다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사법당국의 감시가 이어졌고, 연좌제로 가족의 고통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슬픈 사연을 숨겨왔던 수형희생자들 가운데 오희춘 할머니, 현창용 할아버지 등 18명은 용기를 내 지난해 4월 제주지방법원에 무죄를 확정해줄 재심을 청구했고, 4ㆍ3사건 70주년을 보름여 앞둔 19일 이들 중 4명(현창용, 부원휴, 김평국, 오희춘씨)이 증언을 위해 법정에 섰다.
재심 변호를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당시 2,300여명의 민간인이 세 차례 열린 군법회의를 통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특히 1948년 11월 계엄령 이후 800여명이 내란죄로 처벌됐다”며 “이들에게는 아직 전과 기록이 남아있다. 일반인에게 내란죄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죄목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군법회의에서 받은 불법 재판을 취소하고 다시 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의미로 재심을 청구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오후 70년 만에 법정에 다시 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휠체어에 의지해 가장 먼저 법원에 도착한 김평국 할머니는 “긴장이 되고 떨린다”라며 짧게 말하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수형희생자들을 도와 온 4ㆍ3도민연대 김영란 조사연구원은 현창용 할아버지 휠체어 앞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이야기하세요”라며 힘을 북돋웠다. 19일 2차 청구인 증언에 이어 5월부터 7월까지 남은 청구인들의 증언이 이어질 예정이다. 변호인단은 “빠르면 7, 8월내 재심 개시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70년만에 어렵게 시작했지만 이들 수형희생자의 투쟁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4ㆍ3사건 관련 군법회의는 판결문도, 공판조서도 남기지 않았다. 오직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보관창고에서 발견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2,350명)에 의존한 법정 싸움이다. 재판부(형사2부 ㆍ부장판사 제갈창)는 이들 증인 심문과 관련 자료 검토를 통해 수형인명부와 죄명만을 가지고 재심을 진행하는 게 타당한지를 조만간 결정할 예정이다. 재심이 결정되면 좌익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절차가 진행되면서 좌우가 함께 희생된 4ㆍ3 규명의 큰 족쇄가 풀릴 전망이다. 사실 제주는 그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해왔다. 2013년 각각 좌우를 대표하는 제주 4ㆍ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의 ‘화해와 상생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이 사례이다. 하지만 만일 재심 진행이 좌절된다면 수형희생자를 대표해 법정에 선 18명이 생전에 죄목을 벗는 것은 물론 4ㆍ3의 깊은 상처도 온전히 아물지 못한다. 30여분의 짧은 증언 시간 동안 70년의 한을 토해낸 오희춘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닮았다고 한 동백꽃이 떨어지는 제주 시내로 걸어 나갔다.
제주=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사진=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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