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나 카드사 등 금융회사의 방대한 고객 정보를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익명정보로만 가공하면 얼마든지 다양한 분야에 쓸 수 있게 된다. 고객 맞춤형 상품 개발은 물론 신용평가 체계도 훨씬 정교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간 금융경험 이력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던 청년, 주부 등도 제도권 금융으로 포용할 수 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금융위원회는 19일 금융 분야 빅데이터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금융분야 데이터활용 및 정보보호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듯 오늘날의 데이터도 마찬가지”라며 “데이터 활용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소비자 중심의 금융혁신을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우선 금융분야 데이터를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삼기로 했다. 금융분야 데이터는 다른 산업에 견줘 쌓인 데이터 양이 많고 정확도도 매우 높아 경제적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금융회사가 보유 중인 고객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상반기 중 신용정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번 방안은 익명정보, 가명처리정보 개념을 도입한 게 핵심이다. 금융사가 고객정보에 대해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익명정보’ 처리하면 자유로운 분석과 이용을 보장하는 것이다. 가명처리정보 역시 익명정보와 비슷한 개념인데 추가적인 정보를 사용하지 않으면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된 정보다. 익명정보보다 식별화가 조금 더 이뤄진 것으로, 이 정보는 과학연구 등 공익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금융회사가 고객정보를 비식별화하면 얼마든 활용할 수 있다. 정부는 지난 2016년 법 개정에 앞서 이를 허용하는 내용의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빅데이터 분석에 나서는 금융사는 거의 없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가이드라인은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인을 알아볼 수 없게 익명처리하도록 하는 ‘비식별 기준’이 과도하게 높은 점도 금융사들이 꺼리는 이유다. 정보 분석 효과가 거의 없는 셈이다.
신용정보법 개정으로 금융사들이 고객 정보를 익명처리해 자유롭게 활용하는 게 가능해지면 금융사로선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상품 개발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또 이런 정보를 파는 것도 가능해진다. 오유정 금융위 사무관은 “지금은 카드사와 보험사가 빅데이터 분석을 하긴 하지만 기존 데이터가 세분화돼 있지 않아 사실상 거시 목적의 분석만 가능하다”며 “앞으론 상당히 세세한 분석이 가능해 상품 개발은 물론 창업을 준비 중인 자영업자들도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카드사도 보유한 양질의 정보를 활용해 다양한 빅데이터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부수업무로 허용할 계획이다.
데이터 중개플랫폼은 금융보안원이 운영한다. 금융사가 플랫폼에 제공가능한 정보의 요약정보를 올리면 수요자가 이를 보고 빅데이터 분석을 의뢰해 관련 정보를 넘겨 받는 식이다.
빅데이터 활용이 활성화되면 개인신용평가 체계가 고도화돼 그간 금융경험 이력이 부족해 신용평가 때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던 주부, 청년 등이 혜택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금융회사는 대출심사를 할 때 신용조회회사(CB)사로부터 받은 개인신용평가 결과와 자체 평가를 함께 고려해 대출한도, 금리 등을 정한다. 하지만 지금까진 데이터 활용이 제약되 금융사 자체 신용평가 시스템을 고화화하는 데 한계가 적지 않았다. 정부는 앞으로 금융사가 대출심사 때 통신료, 가스료 납부실적 등 비금융 데이터를 적극 활용하도록 유도하겠단 계획이다.
정부는 신용정보산업의 경쟁을 촉진하는 차원에서 CB사 진입 문턱도 대폭 낮춘다. 특화 CB사를 도입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앞으로 통신료, 공공요금 납부실적 등을 활용해 개인신용점수를 산출하는 비금융정보 특화 CB사에 대해선 완화된 자본규제(50억원→10억원)를 적용키로 했다.
‘개인신용정보 이동권’도 도입된다. 정보 주체가 자신의 정보를 보유한 금융회사·신용평가(CB·Credit Bureau)사 등에 이를 다른 회사나 자신에게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권리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보다 나은 금융서비스를 간편하게 선택할 수 있게 해주자는 취지에서다. 예컨대 개인이 거래 기관에 본인의 사회보험료, 통신료 납부실적을 CB사에 제공하도록 요구하면, 개인은 자동으로 본인의 신용평가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식이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에 개인들 사이에선 ‘내 개인 정보가 나도 모르게 함부로 사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될 게 분명하다. 이에 대해 오 사무관은 “고객정보의 경우 완전히 익명처리하기 때문에 마케팅 전화가 오는 식의 불편을 겪진 않는다”며 “또 금융사의 정보보호 및 보안 조치는 대폭 강화했다”고 말했다.
대신 정보 주체인 소비자의 대응권이 강화된다. 데이터 분석에 기댄 ‘프로파일링(알고리즘 신용평가, 보험료 자동산정 등) 대응권’이 대표적 예다. 자신의 신용등급이나 보험료가 책정된 정보 분석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다.
다만 이번 조치는 모두 신용정보법 개정이 이뤄져야 가능하다. 국회 리스크가 상당하단 얘기다. 정부 계획한 대로 올 상반기 중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하반기 곧바로 시행한단 방침이다. 하지만 고객정보를 금융사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을 두고 소비자들의 거부감도 상당해 사실상 상반기 국회 통과는 어려울 거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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