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빨강
빨간 색은 ‘위험’ 및 ‘위급’을 상징한다. ‘미투(#Me Too)’ 운동을 색깔로 상징하면 ‘빨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1960년대 말 미국 페미니스트 단체 중엔 ‘레드 스타킹스(Red Stockings)’가 있었다. 미투 운동은 충격파가 일파만파 방대하고 강렬하다는 점에서 위험하게 여겨지지만,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더없이 위급하고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현안이다. 분명 옳다고 믿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에 기운이 달릴 때, 위트 넘치는 그림책 ‘빨강’을 펼치자. 싱긋 웃고 천천히 고개 끄덕이며 새로이 힘 빠진 누구를 격려하려 궁리하게 된다.
‘빨강’의 하드커버 표지는 당연히 빨강, 에폭시 후가공으로 투명하게 얹은 제호와 그림과 저자명 출판사명이 보일 듯 말 듯 숨었다. 질감이 다른 빨강 면지를 넘기면, 비로소 색깔 너머 텍스트와 그림으로 구현된 시 ‘빨강의 노래’가 시작된다. “빨강이 반짝반짝/ 빨강이 활활/ 빨강이 앗/ 빨강이 새콤달콤/ 빨강이 꿈틀꿈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빨강.”
반짝 반짝하는 빨강은 무엇일까. 햇살을 터뜨리는 해, 까만 눈동자 까만 머리카락 동그스름한 얼굴의 립스틱 바른 입술, 길게 목을 늘인 긴꼬리 수탉의 볏, 화려하고도 다양하게 디자인된 무채색 신발들 사이의 아이 구두, 이브 쪽으로 가지를 기울인 커다란 나무의 열매. 활활 타오르는 빨강은 어떨까. 장작더미 위의 모닥불, 모래밭에 꽂힌 채 파라솔을 관통하는 온도계 형상의 우산대, 폭발하는 화산의 마그마, 불바다 속의 소화기,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들고 있는 반대 표지와 깃발.
다음은 주의를 주고 경고하는 빨강이다. 상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과 신호기의 빨간 등과 금지를 뜻하는 픽토그램과 경기 심판의 퇴장 카드와 늑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빨간 모자 아이. 그리고 이어지는 빨강의 이미지는 감각의 잔치다. 쟁반에 수북이 담긴 체리와 둥글게 아치를 이루며 만발한 장미와 원숭이 엉덩이와 여름 휴가철 달력의 풍성한 휴일들과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굴뚝으로 들어가는 산타할아버지, 그야말로 새콤달콤 맛있고 향기롭고 재미나고 신나고 즐거운 빨강. 마지막 구절 ‘빨강이 꿈틀꿈틀’을 그려내는 장면은 놀랍다. 사람의 삶과 생명이 뿜어내는 힘과 열정의 상황들 가운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빨강이 꿈틀”의 마지막 두 장면은 뜻밖의 도발이라 할 만하다. 궁금하신 분은 주저 말고 서점으로 달려가시길.
빨강
이순옥 글∙반달 그림
반달출판사 발행∙60쪽∙1만5000원
28장면의 스타카토 반주에 의한 혼성 합창곡 같은 이 그림책 덕분에, 무채색 투성이 내게도 빨강이 콜콜 샘솟는다. 네모난 마음이 동글동글 파문을 일으킨다. 말 잇기 놀이 같은 시적 서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당기고 밀어가는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이미지들을, 작가는 수없이 모으고 버리고 다시 모으며 조합하고 엮었을 것이다. 들여다볼수록 매혹적인 이 빈티지 이미지들을 구현하기까지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실험을 시도했을까. 모아보고 늘어놓아보고 싶다. 빨강으로 보이는 것, 빨강으로 상징되는 것, 빨강으로 강조되는 것... 빨간 색의 시와 그림을 계속 진행하고 이어보고 싶은 독자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복원 연구가 스파이크 버클로의 ‘빨강의 문화사’에 의하면 “빨강이 아름다운 것은 빛이 겪는 수난과 인내의 결과”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진통 또한 아주 진한 빨강을 위해서이길!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