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쓰고 죽으면 어떡해” 비아냥
존댓말쓰기 캠페인 등 자구책에도
가혹행위 여전… 1년 내 이직 34%
간호사 인력 부족이 근본적 문제
“격무 시달리는 한 계속될 것” 지적
“너도 죽을 거야?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마라.”
경기 수원시의 대형병원에서 3년째 근무 중인 간호사 이모(25)씨는 최근 동료 간호사들과 밥을 먹다 두 귀를 의심했다. ‘태움(간호사집단 내 괴롭힘)’을 두고 한창 얘기하던 중 한 선배가 “요즘은 신입 간호사들 건드리지도 못하겠다”라면서 “내 탓이라고 유서 쓰고 죽으면 어떡하냐”고 비꼬았기 때문. 이씨는 “병원 밖에서는 태움이 사라져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병원 내부는 바뀐 게 하나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일하던 박선욱(27) 간호사가 숨진 이후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병원 내 악습 태움에 대한 각종 근절 대책이 대두되고 있지만 정작 간호사집단 내 움직임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알게 모르게 행해지는 태움에 고통을 호소하는가 하면, “이런 식으로 가면 태움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하기도 한다.
특히 간호사들은 신입 간호사에 대한 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지난해까지 서울 동작구의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A(26)씨는 “며칠 전 동료 간호사에게 ‘너무 힘들다’는 연락을 받았다”라며 “구멍이 난 채로 병동에 수액이 왔길래 쪽지에 ‘터졌음’이라고 써놨는데, 선배가 갑자기 ‘선배 간호사들이 보는 쪽지에 존댓말로 쓰지 않았느냐, 선배가 네 친구처럼 보이냐’고 태웠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박 간호사 사망 이후 병원에서는 신입 간호사에게 이뤄지고 있는 태움 등 업무 환경 실태 조사부터 ‘서로 존댓말 쓰기’ 캠페인까지 다양한 대책과 해법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선배 간호사들은 “우리 병원 사건이 아니다“거나 “성격이 너무 민감하고 꾸짖음을 참지 못하는 일부 간호사 문제”라는 식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로 인해 아예 병원 취업을 포기하는 예비 간호사가 늘고 있다.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간호학과 4학년 김모(23)씨는 최근 병원 대신 대기업 채용공고를 찾는 중이다. 박 간호사 죽음 관련 모든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병원 태도에 염증을 느껴서 간호사 취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번 사건을 보며 많은 동기가 간호사 꿈을 버리고 있다”라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지만 평생 직장의 꿈을 포기하려니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경력 1년 미만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이 33.9%에 달할 정도(2015년 대한간호사협회)로 인력 문제가 심각한데, 여기에 예비 간호사까지 병원 입사를 포기할 경우 인력난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1인당 업무량이 많아 신입을 현장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해 혹독하게 가르칠 수밖에 없으니 태움이라는 악습의 근원적인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결국 인력 충원 같은 제도적인 해결책, 간호사 간 서로를 존중하는 배려 문화의 정착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병원 내 태움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김소선 연세대 간호대학 교수는 “생명을 다루는 현장이라는 책임감에 비해 간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등 태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병원과 간호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신입 간호사 교육방식 개선 등 근본적이고도 현실적으로 필요한 해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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