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록이라 불리던 꽃사슴이 있습니다. 여름철 온 몸을 가득 덮은 흰색 무늬가 매화와 같다 하여 부르던 사슴이죠.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십장생도에도 오르는 점무늬 사슴, 1976년 발굴된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 수렵벽화의 선명한 흰 점을 가진 사슴이 바로 매화록, 즉 꽃사슴입니다.
꽃사슴의 학명은 Cervus nippon, 영어로는 Sika deer입니다. 학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일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죠. 영명의 Sika는 사슴의 한자인 록(鹿)의 일본 발음 ‘시카’에서 유래했습니다. 속명의 Cervus는 뿔이라는 어원을 가진 Cer-에서 왔습니다. 참고로 아이들이 많이 아는 트리케라톱스는 ‘얼굴(-ops)에 세 개(tri-)의 뿔(cerat)을 가진 공룡’이라는 뜻입니다.
꽃사슴의 외형 중 가장 큰 특징은 몸통의 흰 반점과 더불어 수컷의 뿔입니다. 겨울털은 두텁게 자라 흰 반점이 가려지지만 여전히 듬성듬성 찾아볼 수 있죠. 노루나 고라니도 어린 시절 흰 반점이 있지만 성장하면서 사라지는데 꽃사슴만은 성장해도 반점이 남아있습니다. 뿔은 수컷에게만 나는데 다 자라면 모두 4개의 가지가 돋습니다. 이 중 세 개의 가지는 외측면으로 자라나고 한 가지만 안쪽으로 납니다. 사슴이나 노루의 뿔(antler)은 소나 염소의 뿔(horn)과는 다르게 매년 자라났다가 떨어지길 반복하죠. 꽃사슴의 경우 5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운 뿔이 자랍니다.
자라나는 연약한 뿔을 감싸고 있는 부드럽고 가는 털 조직을 벨벳(velvet)이라고 합니다. 벨벳은 중장년층 독자들은 아실 만한 ‘빌로드(veludo, ‘비로도’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포르투갈어의 일본식 발음입니다)’라는 원단을 일컫기도 하죠. 짝짓기는 10~12월에 이뤄지기 때문에 수컷은 10월까지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뿔을 준비해야 싸움에 승리하여 암컷 무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듬해 4~5월경 뿔이 떨어지고 다시 다음 뿔을 준비하는 한해살이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꽃사슴이 살고 있을까요? 1959년에 발간된 ‘수렵본위 한국야생동물기(이상오 저)’에서는 남획으로 인해 우리나라 전역에서 거의 멸종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1967년 문교부가 발간한 ‘한국동식물도감 포유류 편’에서는 대륙사슴은 중국에서만 분포하고, 우수리사슴은 함경남북도 일부에만 서식하는 듯하다는 의견입니다(대륙사슴, 우수리사슴 모두 꽃사슴을 뜻합니다). 1968년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짐승류지(원홍구 저)’에서도 일제 강점기 남획으로 인해 거의 전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꽃사슴은 적어도 1960년대 이전에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기록들입니다. 이에 따라 현재는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죠.
야생에서의 절종은 러시아나 대만에서도 발생한 바 있습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유로 고립된 대만꽃사슴은 남획과 서식지 소실에 의해 1969년 마지막 개체가 포획되었지요. 다행히도 사육 개체군은 남아 있어 1984년 복원 결정 후 1994년 최종적으로 대만 남부 컨딩국립공원에 방생하여 현재 1,000마리가 넘는 개체가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특정 동물종을 보전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분류학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종 단위까지도 잘 따져서 살펴봐야 합니다. 생물 분류 단계의 하나인 아종은 종의 아래 단계이고 변종의 위 단계에 속하는 종으로 독립할 만큼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변종으로 하기에는 다른 점이 많은 한 무리의 생물을 뜻합니다.
한반도에서 네팔ㆍ인도ㆍ방글라데시의 벵골호랑이가 아닌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라고도 하며 백두산호랑이가 여기에 속합니다)라는 아종을 보전하려는 이치와 같습니다. 꽃사슴 자체의 분류는 명확합니다만, 아종 분류가 워낙 복잡합니다. 크게 분류하자면, 일본 중북부 아종, 일본 남부 아종, 대만 아종, 그리고 대륙 아종인 C. n. hortulorum 등 4개 아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아종은 C. n. hortulorum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13~14개 아종 중 우리나라 아종을 C. n. mantchuricus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꽃사슴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20세기 초중반에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명확한 원종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대신 사찰이나 군부대에서 풀었거나 사슴농장에서 탈출한 정체 모를 교잡 꽃사슴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살아가고 있죠. 멸종위기종 복원종으로 야생으로 돌려보낸다 하더라도 교잡 사슴들과의 유전오염이 무척이나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뉴질랜드, 호주, 미국, 그리고 17개국 이상의 유럽국가 등 전세계 여러 나라에 건너간 일본 꽃사슴은 유럽에서 개체수 증가로 인한 환경과 경제적 피해를 일으키고 있고, 교잡의 문제도 낳고 있죠.
게다가 Cervus 속 사슴들은 서로 교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도입된 꽃사슴이 토종 붉은사슴과 교배하기 시작하여 유전적 오염이 발생한다는 우려까지도 나오는 상황이 남일은 아닐 겁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는 꽃사슴으로 인한 산림과 농작물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고, 유럽에 도입한 꽃사슴은 집쥐와 사향쥐에 이어 세 번째로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동물종을 복원하는 사업은 자연유산을 후세에 되돌려주려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다만 대형동물의 복원사업은 장기적 전략을 잘 모색하고 국내외 사례를 참고하여, 철저한 준비 하에 진행해야 우리가 의도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산하에서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듯 한 꽃사슴을 만나볼 날을 기다려 봅니다.
글ㆍ사진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병원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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