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힘’을 다해 들어간 직장에서 결국은 ‘죽지 못해’ 튕겨져 나왔습니다. 분노로 논하기 시작한 ‘퇴사’는 곧 뒤늦은 자기 반성이 됐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퇴사담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퇴사인간’들의 외침에 한국일보가 귀를 기울여 봤습니다.
기획/제작 : 박지윤 기자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엊그제 산 두통약이 있겠지. 살 때는 10알이었는데 반이 넘게 비어 있다. 아, 이제는 끝내야겠다. 이대로라면, 정말 일찍 죽을지도 몰라. 그 해, 그는 첫 직장과 이별했다.
'퇴사인간'이 탄생했다. 모두가 죽을 힘을 다해 회사에 들어가지만, 금세 죽기 일보 직전이 되어 튕겨져 나가는 이상한 세상 속에 등장했다. “우리 모두에겐 ‘퇴사론’이 필요합니다.” 백수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직장,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곱씹기 시작한 이들은 신인류에 가깝다.
“퇴사를 할 땐 다들 내가 왜 퇴사를 하는지 몰라요. 도저히 이대로는 견딜 수 없으니까 튕겨져 나오는 거죠. 저도 그랬어요.” 올해로 퇴사 2년 차를 맞이한 곽승희(31)씨의 첫 회사는 언론사였다. ‘기자’를 꿈꿨던 시간이 길었다.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회사의 일원이 되고 보니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매일 대충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에 적신 빵을 욱여넣으며 끼니를 때웠어요." "새벽 퇴근길엔 신문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를 만났죠." 몸이 망가지는 건 당연했다.
“누군가 말했어요 '난 이 회사 오기 전에 몇 번을 퇴사했어.” 어? 너도? 나도! 대화는 지칠 줄 모르고 이어졌죠."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때부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퇴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상엔 이렇게 다양한 ‘퇴사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고민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퇴사 전문 잡지 <월간퇴사>의 1호와 2호엔 총 18명의 ‘퇴사 이야기’가 실렸다.
‘백수’로 불리던 이들은 퇴사인간이 됐고 비로소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게 됐다.
"우리를 괴롭게 만든 회사와 조직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을까. (…)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우리 세대에게 퇴사는 일상이자 생활이 된 게 아닐까?”–월간퇴사 1호 편집장의 글 중에서-
퇴사를 생각하다가 오히려 회사 안에서 ‘더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중문과 다니는 4년 내내 삼국지 끼고 당나라 시를 암송했어요. 그런 저에게 갑자기 IT 업무가 떨어진 거예요. 입사 첫날 퇴사를 결심했죠.” 퇴사 담론 팟캐스트 <내-일은 가볍게>를 진행 중인 김가현(28)씨의 얘기다.
“<퇴사학교>에서 만난 언니들과 회사를 씹으면서 친해졌는데, 팟캐스트를 시작하고선 ‘통찰’을 담아서 씹었어요. 하다 보니 점점 화는 가라앉고 결연해지는 거예요. 발상의 전환이 시작됐다. 어차피 나갈 회사라면, 할 건 다 하고 나가야지. 제대로 이용하고 회사를 잘 ‘졸업’하자.
“까라면 까!” 라는 요구에 맞받아쳤다. “싫은데요?” “아무도 사용해본 적 없었던 생리 휴가를 신청해 봤어요. 처음엔 여직원들이 생리휴가를 악용하면 어쩌냐, 말도 안 되는 걱정을 늘어놨죠. 근데 결국엔 됐어요.” ‘이게 되겠어?’라며 지레 포기했던 일이었다.
건너 건너 좋지 않은 소문도 돌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면 안 볼 사람이었다. "입사 첫날 퇴사를 결심했는데 벌써 2년 넘게 그 회사를 다니고 있네요!" 시간이 지나자 할 말은 해도 밉지는 않은 막내가 됐다.
그의 신조는 이렇다. 누구든 한 직장을 평생 다닐 수 없는 고용불안의 시대라면, ‘언젠가 떠날 생각’으로 후회 없이 누리고 살자. “언젠가 저처럼 본의 아니게 IT 업무를 하게 된 문과생들을 위해 <어쩌다 IT>라는 책을 쓸 거예요. 그러기 전엔 이 회사를 잘 졸업해야겠죠?”
같은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백서현(29)씨는 퇴사를 선언하자 '휴직'이 돌아왔다. "인도에서 3개월을 살았어요. 요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 거기서 자격증도 땄죠. 돌아오면 다시 스트레스가 시작될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저도 신기해요.” 그렇게 직장생활 2막이 열렸다.
“제가 하는 디자인 일은 창의성을 요하는 만큼, 소모된다는 느낌이 아주 심했어요. 근데 재충전이 되니 옛날만큼 숨 막히지 않아요.” 제대로 쉬고 돌아오니 다시 출근할 힘이 솟았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이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을 해요. 몰두가 필요하니 번아웃(Burn-out)되기 쉬워요. 회사가 나빠서 떠난다기보단 진짜 쉴 시간이 필요해서 나가는 거죠.” 퇴사 1년 반째를 맞은 <월간퇴사> 기고가 김정현씨는 바뀐 시대에 조직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완전히 새로운 ‘일의 형태’가 필요한 법. “한 달 일하고 일주일 쉬거나, 1년 일하고 한 달 쉬거나 하는 식의 유연한 구조가 돼야죠. 빈자리는 어떡하냐? 사람 더 뽑아서 시키면 되죠. 일자리도 부족한데.”
“정치인들이 안식 달, 간헐적 휴직을 말하지 않는 게 참 신기해요. 아 참, 나라면 그런 거 공약할 텐데.”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조직을 모색 중이다. “답 없어서 나왔으니 답을 만들어 봐야죠.”
퇴사가 능사냐, 물론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않다. “돈을 안 벌면 당장 죽나요? 젊은 친구가 왜 일을 안 해? 혀를 차요, 대부분. 근데요.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건 ‘일’이 아니에요. ‘왜’라는 질문이죠.”
일자리는 없는데 좋은 일자리는 더 없다. 그런데 충족시켜야 할 욕구는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분명, ‘퇴사’는 능사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퇴사’라는 고민,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화두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취업준비생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회사를 그만둔 사람도 한 번쯤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대로 사는 건 괜찮은가” ‘퇴사’를 고민하며 삶과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21세기 ‘퇴사인간’의 능사가 아닐까.
기획/제작_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출처_게티이미지뱅크, 박지윤 기자, 취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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