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가톨릭 교회에는 엘 살바도르 반독재의 상징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나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스 추기경도 있지만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부역자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도 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만큼이나 깊이 권력과 부에 뿌리를 대고 성장해 온 게 남미 가톨릭 교회지만, 가난한 이들의 대변자로 독재 권력에 저항한 해방신학자들이 탄생한 곳이 거기였다. 그 양 극단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오랜 식민지 시절과 독립 후 쿠데타와 독재의 정치 불안기, 민주화 이후 오늘까지 남미 가톨릭 교회가 성장해 왔다.
가톨릭교회의 독재 부역이 가장 도드라졌던 국가 중 한 곳이 아르헨티나였다. 그곳 대주교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1936~) 추기경이 남미 출신으론 최초로 2013년 3월 13일 교황에 선출됐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성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길을 좆겠다며 역대 교황 265명 누구도 갖지 않던 그 이름을 선택했다. 제266대 현 교황 프란치스코(Francesco)다.
교회 개혁과 사회 정의를 향한 그의 행보는 가히 눈부시다. 그는 부의 편중을 성토하고, 교회 안팎의 권력자와 신자들의 위선을 앞장서 비판해왔다. 이름처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온 그는 스스로도 숙식의 관저를 교황 사도궁전이 아닌 성녀 마르타 호텔로 바꾸는 등 일거수일투족 청빈과 검소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교황청 소속 추기경과 직원들에게 관행적으로 주던 취임 기념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은 데서 시작해 바티칸은행과 교황청 재정을 개혁하고, 종신형 폐지와 아동 성범죄 형량 강화 등 시국 형법을 개정했다. 남미 교회 과거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그는 취임 6주 만에 로메로 추기경의 시복 절차를 추진했다.
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시민 학살과 고문이 극에 달했던 ‘더러운 전쟁’(76~81년)시기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73~79)을 지냈다. 그는 교황 피선 전부터 군정 부역 의혹으로 시민ㆍ유족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는 부인했고, 2016년에는 교황청 및 아르헨티나 교구 관련 문서 일체를 ‘더러운 전쟁’ 피해자 및 유족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적극적 부역이든 침묵의 방조든, 그의 책임이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를 향한 그의 집념에는 참회와 속죄,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을지 모른다. 과거의 자신과 친해지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은 더 나약하고 비열한 짓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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