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구 금융위원장의 ‘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
아데어 터너 지음ㆍ우리금융경영연구소 옮김
해남 발행ㆍ467쪽ㆍ2만원
▦추천사
2008년 전대미문의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감독당국 수장이었던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이 최일선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금융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과 날카로운 정책대응 논리는 성숙기를 맞는 한국 금융산업과 정책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재앙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중략) 그리고 2008년 가을에 시장이 무너진 후에도, 이 위기가 얼마나 깊고 또한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시스템 감독을 총괄했던 저자는 무지(無知)의 고백으로 책을 시작한다. 금융시장이 비합리적 과열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위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위기 이후에도 무너진 은행시스템에 대한 신뢰 회복에 초점을 둔 국제적 개혁을 주도했지만 세계경기는 속절없이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유례없던 금융위기 일선에서 쓰디쓴 실패를 거듭한 저자가 뒤늦게 깨달은 문제의 근원은 바로 부채(신용)였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사례 연구와 신용 창출 메커니즘 등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금융에서 파생된 실물경제의 과도한 부채비율이 금융시장을 붕괴시킨 것은 물론 경제회복마저 더디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2008년 경제적 재앙은 전적으로 스스로 초래한 것이고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부채가 과도하게 쌓여 결국 경제를 해치는 경로로 부동산 투기, 불평등, 경상수지 불균형 등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자본재 가격이 급락하고 있는 오늘날 경제에서 주택과 토지는 더욱 매력적인 자산이 되고 있는데, 문제는 대출을 동원한 부동산 투자(투기)가 정작 실물경제 규모를 키우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만연한 저금리 상황도 이러한 부채의 ‘비생산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저자 진단이다. 부동산 붐은 또 부자에서 빈자로, 경상수지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부채를 흘러 가게 하는 방식으로 자가발전한다. 거품이 꺼졌을 때 부채계약 당사자 중 빈자와 적자국이 더 큰 타격을 입어 양극화가 심화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채는 은행과 비은행(그림자금융)을 막론한 금융기관을 통해 중개된다. 그 과정에서 금융기관 스스로 신용을 창출하며 시장 전체의 부채 규모를 증폭시킨다. 저자는 “금융 활동 증가가 경제에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은 과연 정당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시장은 완전하다’는 주류 경제학의 신념에 대한 의문 제기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이렇다. “은행들은 그대로 놔두면 사회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수준 이상의 부채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비춰볼 때 이 책이 금융시스템에 대한 공적 통제 강화를 해법으로 내놓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저자는 “금융감독은 단지 금융시스템 자체의 안전성 규제를 넘어 실물경제에서 총 민간부채 비율을 통제해야 한다”며 부채 억제를 제언한다. 나아가 금융위기 이후 민간부채는 감축됐지만 재정을 동원한 부양책으로 공공부채는 급증한 점을 들어 “부채는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란 통찰을 내놓는다. 그런 만큼 기존에 쌓인 부채를 상각하는 과정이 불가피한데, 저자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공공부채를 해소해야 한다는 자못 급진적 제안을 내놓는다.
이러한 ‘도전적 해법’이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천문학적 가계빚을 방치할 경우 또 한 번의 금융위기라는 인재(人災)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저자의 경고만큼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1,450조원을 돌파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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