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샘 직장 내 성폭력 피해 여성
가해 상사 형사고소 본격 싸움 나서
‘형량보다 확실한 처벌이 중요’ 인식
여성의날 맞아 제도ㆍ법 변화 목소리
#2
피해자 항거 불가능할 때 강간죄 인정
저항 부족했다고 강간 무죄 판결
사실상 피해자에 입증책임 떠넘겨
영국은 폭행ㆍ협박 없어도 범죄 성립
동기의 화장실 몰래카메라 촬영, 상사들의 잇따른 성폭력, 회유, 오히려 피해자에게 내려진 징계….
2017년 11월 ‘한샘 신입사원 성폭력 사건’으로 알려진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한지영(가명)씨는 전국이 ‘미투(#Me Too)운동’으로 달아올랐지만 여전히 힘겨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후 회사를 떠난 그는 평소 아무렇지 않다 갑자기 피해 상황이 떠오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져들곤 한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말 한씨는 한 인터넷 포털 게시판에 회사에서 겪은 성폭력 사건들과 회사의 대응에 대한 글을 올렸다. 복직을 앞두고 성폭력 피해자인 자신이 오히려 ‘꽃뱀’으로 몰린다는 소식을 듣고 답답한 마음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을 쓴 것이었다. 이 글은 한씨도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고, 이후 한국사회는 직장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다. 한씨의 사건은 해를 넘겨 뜨거운 미투 운동을 일으킨 결정적인 촉매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사연이 알려진 지 한 달 여 만에 회사를 나와 몸을 웅크려야 했던 그가 얼마 전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고 전해왔다. 자신을 당시 성폭행한 교육담당자 A씨와 인사팀장 B씨에 대해 각각 강간죄와 간음 목적 유인 등의 혐의로 형사 고소를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한샘 조사 결과 자료를 요청해 둔 상태. 7일 한씨를 대리하는 김상균 변호사는 “인권위 조사 결과를 확인하는 대로 이르면 이달 내 고소를 할 예정”이라며 “피해자는 아직도 자신을 강간 피해자가 아닌 ‘꽃뱀’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거라도 뒤집어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오직 명예회복”이라고 강조했다.
투쟁 개시를 선언한 한씨는 물론 용감히 ‘미투’를 외친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원하는 결말은 가해자의 행위가 ‘실수’ 혹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변명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해자를 포함한 사회가 이를 분명한 ‘범죄’라 인정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이들은 ‘미투 열풍’이 유행처럼 번지다 사그라지면 우리 사회가 다시 권력에 기반한 성폭력을 용인할 것을 두려워한다. 성폭력에 당당히 맞서는 전 세계인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확고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는 한씨, 그리고 ‘미투’에 참여한 피해자들이 바라는 ‘애프터 미투(After Me Too)’에 대한 메시지는 무엇보다 이같은 바램과 우려를 감싸 안을 제도와 법조계 인식의 합리적인 변화이다.
“성폭력이었음을 사회가 인정해달라”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국장은 “인정의 방식은 법원의 판단이나 가해자의 사과와 반성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내(피해자) 잘못이 아니었음을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받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내가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피해자들은 처절한 싸움을 하기도 한다. 송 국장은 “성폭력 가해자에게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을 때, 최소한 범죄는 사실이라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잘됐다고 하는 피해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법적 싸움에 나선 피해자들은 ‘무거운 형량’보다는 ‘확실한 처벌’을 원한다. 사회적 공분 속에 성범죄 형량만 높아지면 사법부는 유죄 판단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최영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반드시 실형이 아니더라도 성폭력 피해가 형사처벌법상 유죄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피해자 지원 그룹들은 피해자의 일터나 학교에서도 정당한 인사조치가 이뤄져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고 피해자가 온전히 안전하게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국제사회 기준에 못미치는 강간죄 관련 법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투운동’으로 일어난 피해자가 원하는 결말까지 갈 길은 너무나 멀다. 성폭행 사건의 경우 강간죄 인정 자체가 쉽지 않다. 형법의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이 수반돼야 하며, 더구나 우리 법원은 피해자의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해야 강간이라는 판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기준은 피해자에게 강간죄 입증 책임을 떠넘겼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지난달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서도 강간죄에 대한 한국의 법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엔 규약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적으로 보며 상대방이 거부를 했다면 강간죄가 성립한다. 영국의 경우 폭행이나 협박이 전혀 없더라도 강간죄 성립이 가능하며 미국과 독일에서는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한 상태’임이 인정되면 강간죄가 성립한다.
법과 판례가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성폭행 사건을 다툴 때 피해자는 큰 부담을 져왔다. 20대 대학원생 이나연(가명)씨는 지도교수의 친구인 40대 남성 사업가 C씨와의 술자리에 불려갔다가 그의 차 안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강간죄로 고소했지만 ‘피고인이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판결문에는 ‘(피해자의) 내심의 의사에 반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명시하고, 피해자가 소극적 저항을 하거나 거부의사를 표현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싫어하는 것을 피고인이 알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저항을 했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저항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지만, 이런 점은 감안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증거 입증 책임지는 성희롱
성희롱의 경우 싸움은 더 어렵다. 성희롱은 양성평등기본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서 불법행위이지만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다. 배수진 서울지방변호사회 성희롱피해구제센터 센터장은 “민사 소송만이 가능한 성희롱의 경우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으면 수사관도 유리한 증거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형사 사건이 아니라 증거 입증 책임이 모두 피해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한다”라며 “성희롱 피해자들은 여성단체, 노동청, 국가인권위원회, 회사와의 합의 등 지리한 과정을 다 거쳐도 끝낼 수 없으니 민사까지 오는 경우가 많아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도 많다”고 지적했다.
정미현(27ㆍ가명)씨는 2016년 한 중소기업 사장의 개인비서로 입사했다 50대 남성 사장의 계속된 성희롱에 시달려 석달만에 퇴사했다. 남자친구가 있는 정씨에게 사장은 “1주일에 성관계를 몇 번 하느냐”고 묻거나 치마를 입고 다니면 “여자는 허벅지가 튼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일상이었다. 성접대 경험 이야기에 정씨가 부정적인 내색을 비추면 “이런 쪽에 트여있을 줄 알고 비서로 뽑았다”고 말했다.
사장의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정씨는 한여름에도 긴 팔 긴 바지를 입었다. 사장과 업무상 대화 외 사적 대화도 피했다. 하지만 사장은 오히려 정씨에게 “비서가 오피스 와이프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애교도 떨지 않고 눈치 보도록 하는 게 맞냐”며 질책했다. 성희롱 신고를 위해 사장의 말을 녹음하고 주변에 자문을 구했지만 ‘증거로 불충분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성범죄 소송에서 가해자 시장과 피해자 시장의 불균형도 심각하다. 미투운동이 고발하는 성범죄 사건에서 사회적 위치나 경제력이 보장된 경우가 많은 가해자와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자인 피해자의 변호사 선임 비용 차이는 현격하다. 이 격차는 변론의 질적 차이로 이어지고 승소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현행 여성가족부가 기관을 거쳐 성폭력 피해자에게 제공하는 무료법률지원도 앞으로 피해자의 소득별로 지원 기준을 정하고 소송비용을 변호사를 선임한 피해자에게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고죄 고소 남발 막을 장치 필요해”
소송에 나선 피해자는 사실적시 명예훼손과 무고 등으로 역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성범죄 피해자로서 결말을 맞기도 전에 피의자로서 수사를 받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최근 미투 운동이 거세지는 가운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가해자에게 고소를 당하는 경우가 늘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성범죄에서뿐 아니라 전반적인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비판, 여론형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아 국회에서도 폐지안이 2016년 발의됐다.
무고죄 역시 마찬가지. 피해자는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꽃뱀이 아니냐’는 가해자측의 공격에 시달려야 한다. 때문에 여성단체에서는 원래 성범죄 사건의 법적 절차를 다 밟을 때까지 피해자에 대한 무고죄 적용을 유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송 사무국장은 “가해자들이 매뉴얼처럼 무고죄 고소를 남발하면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길 망설인다”고 지적했다. 이은의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피해자 입장이 안타깝지만 기소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내릴 때 검사가 ‘무고의 여지는 검토되지 않는다’라고 한 마디 써 주는 것도 무분별한 무고 고소 남발을 막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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