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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의존해야만 사는 존재, 애완동물인가 반려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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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의존해야만 사는 존재, 애완동물인가 반려동물인가

입력
2018.03.0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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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은 우리에게 오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평생 의존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애완동물은 우리에게 오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평생 의존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칼럼에 ‘반려동물’보다는 ‘애완동물’이 더 적절한 표현인 첫 번째 이유를 썼다. 모르는 사람과 애완동물 중에 또는 입양아와 애완동물 중에 한 쪽을 구해야 한다면 모르는 사람이나 입양아를 구하는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애완동물은 반려의 대상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유들을 제시하겠다. ▲지난 칼럼 보기

우리가 애완동물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은 기르던 애완동물이 새끼를 낳거나 구입하거나 분양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구입하는 것부터 반려 관계라고 부르기 어렵다. 어떻게 돈을 주고 사는 관계가 반려인가? 하지만 이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로부터도 문제 제기가 많이 되고 있으므로 이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문제는 애완동물은 우리에게 오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평생 의존해서 살아야 하고 주인의 선택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이다. 애완동물의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이다. 애완동물은 잠 잘 곳과 먹을 것을 인간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야생의 추위와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도록 개량(?) 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버려지면 대부분은 쉽게 죽고 만다. 

물론 인간도 어린이나 일부 노인이나 장애인은 보호자에게 의존적이긴 하다. 그러나 어린이는 성인이 되면 의존성을 벗고 자립을 하고, 노인이나 장애인은 처음부터 의존적인 존재라고 예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완동물은 종 자체가 의존적이다. 모든 개체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의존성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완동물은 평생 귀여움을 지니고 있도록 교배된 대신, 상위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곳과 먹을 곳을 제공받았다. 픽스히어
애완동물은 평생 귀여움을 지니고 있도록 교배된 대신, 상위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곳과 먹을 곳을 제공받았다. 픽스히어

애완동물은 처음부터 의존적인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모든 동물의 새끼는 귀엽다. 그런데 애완동물은 어릴 때의 귀여움을 평생 동안 지니고 있도록 교배되었다. 우리와 친숙하게 된 것은 그 귀여움 때문이다. 애완동물은 그 대신에 상위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곳과 먹을 것을 제공받았다. 

또한 애완동물은 거친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보호자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다. 주인이 없으면 캔 안에 든 먹이도 먹을 수 없고 운동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애완동물의 의존성은 취약성이라고도 불린다. 애완동물은 인간의 보호가 없다면 환경에 매우 취약하다. 급기야 ‘사회적 기생 동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사실 기생 동물보다 더 열악하다. 기생 동물은 적어도 유기될 염려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생 동물은 애완동물과 달리 인위적으로 기생 동물이 된 것도 아니므로 의존적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이런 의존적인 존재를 반려동물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어사전의 ‘반려’의 뜻은 “짝이 되는 동무”로서 대등한 관계일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한쪽이 다른 한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를 반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반려동물은 사람들과 평생 같이 살지 않는다. 한 동물 보호 단체의 조사(2010 반려동물 소유자 의식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이 죽을 때까지 같이 사는 사람은 12%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사를 갈 때, ‘이웃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니까’ ‘개가 배변을 가리지 못하니까’ 따위의 이유로 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심지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실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지 애완동물의 숙명은 아니니 이런 이유를 가지고 반려동물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애완동물은 인간과의 수명 차이로 주인보다 대체로 먼저 죽는다는 점이 반려동물이 아닌 이유이다. 가령 개는 열몇 살까지밖에 살지 못하므로 대부분의 주인은 개가 먼저 떠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인간도 반려자가 먼저 떠나는 경우가 있지만 먼저 떠날지 미리 아는 것도 아니고 함께 사는 세월이 훨씬 길다. 우리는 ‘평생의’ 반려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먼저 떠날지 알면서도 같이 살고, 같이 사는 세월도 매우 짧은 대상에 대해 반려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우리는 먼저 떠날지 아는 대상에 '반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픽사베이
우리는 먼저 떠날지 아는 대상에 '반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픽사베이

물론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은 이왕이면 듣기 좋게 완곡하게 부른 말일 수 있다. 단순한 말 가지고 죽자고 덤벼드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버려지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의존적이고 버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의존성은 한때뿐이고 유기도 그때에만 한정된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의존적이고 취약적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일보의 동그람이 때부터 시작해서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동물을 둘러싼 윤리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칼럼이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듣기 불편한 이야기로 끝내게 되어 좀 민망하다. 그러나 애완동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지 함께 궁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최훈 강원대 교수(‘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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