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까지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 되어 러시아를 추월할 것이다.”
5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대변인실은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를 요약한 이메일을 미국은 물론이고 외신 기자들에게도 발송했다. 이 보도는 올해 1,000만배럴 정도인 미국 원유 생산량이 2023년에는 러시아의 현재 생산량(1일 1,100만배럴)을 추월하는 1,260만배럴에 달할 것이라는 국제에너지기구(IEA) 전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미국 이익에 도움되는 언론 보도를 백악관이 전파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수치가 이미 알려졌던 내용임을 감안하면 백악관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 추월’에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더욱 치열해진 미ㆍ러 경쟁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얘기다.
미국과 러시아가 국제무대 굵직한 사안들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충돌하고 있다. 옛 소련 부활을 꿈꾸며 절치부심해온 러시아가 이제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다. 미국도 2016년 대선 과정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인 ‘러시아 스캔들’ 때문인지 대러 강경 발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중국이 그 뒤를 쫓는 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감지되면서 ‘신냉전’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해 8~9월 북한이 러시아 홀름스크항을 이용해 석탄을 우회 수출했다는 최근 언론 보도와 관련, 5일 “북한 정권을 돕는 주체에 대해 독자적 행동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캐니타 애덤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대변인은 이 같이 밝히면서 “러시아는 변명하지 말고 유엔 제재를 즉각적이고 완전히 이행해야 한다”고도 요구했다. 대북문제와 관련, 미국이 러시아에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시리아 내전과 관련해서도 미ㆍ러 갈등은 고조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4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의 통화에서 시리아 내전 사태 악화에 대해 “러시아에 압도적인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지원을 받는 시리아 정부군이 동구타 지역에 가한 공습으로 민간인 수백 명이 숨진 데 대해 러시아에 책임을 돌린 것이다. 취임 이후 대러 강경 발언을 자제해 왔던 그가 지난달 말 “나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 러시아에 훨씬 강경했다”고 주장한 데 이어, 또 다시 러시아 비난에 나선 것은 점점 자신을 향해 조여오고 있는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의식한 것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미국의 잇단 비판에 러시아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고 있다.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이날 “미국이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시도는 대통령 선거, 총선을 앞두고 항상 증가했으며, 이런 추세는 현재 대선 기간에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18일 예정된 러시아 대선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을 받는 러시아가 오히려 역공을 가한 것이지만,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진 않아 ‘대미 공세용’ 발언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물론 양국간 가장 첨예한 대립은 여전히 군사ㆍ안보 분야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상대방의 신무기 개발이나 군비 확장을 비판할 때마다 서로 “중거리핵전략조약(INF)을 위반했다”면서 책임 공방을 벌여 왔다. 특히 지난 1일 “세계 어디에든 도달 가능한 ‘무적의’ 핵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푸틴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최근 군비 문제와 관련한 미ㆍ러 대립 국면의 하이라이트였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미국이 미사일방어망 개발 금지 조약을 파기한 게 새 핵무기 개발 이유”라면서 미국 책임론을 명확히 했고,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러시아 신형 미사일 궤적을 그린 시뮬레이션 배경 화면까지 공개했다.
미 국무부는 즉각 발끈하고 나섰다.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은 “무책임하고, 무기감축 협정을 파기하겠다는 증거”라고 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푸틴 연설에선 냉전의 메아리가 울린다”며 “미ㆍ러 관계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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