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여우주연상엔 프랜시스 맥도먼드
남녀조연상은 샘 록웰ㆍ앨리슨 제니
사회자 지미 키멜과 배우들
극장 찾아가 깜짝 ‘관객과 만남’
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0회 아카데미영화상(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깜짝 놀랄 이변과 반전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고 기대했던 감동과 환호가 함께했다. 트로피가 제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결과였다. 상복 없던 게리 올드먼이 ‘다키스트 아워’로 생애 첫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됐고,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쓰리 빌보드’로 ‘파고’ 이후 21년 만에 여우주연상 트로피와 재회했다. 남녀조연상은 ‘쓰리 빌보드’의 샘 록웰과 ‘아이, 토냐’의 앨리슨 제니에게 돌아갔다. 이들 네 배우는 아카데미상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1월 골든글로브와 지난달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일찌감치 유력 수상 후보로 점쳐졌다.
“받을 때가 됐다” 이견 없는 수상
올드먼은 가장 어두운 시간(다키스트 아워)을 지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했다. 언제나 위대했고 매번 새롭게 위대해지는 명배우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아카데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2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때는 애석하게 트로피를 놓쳤으나 두 번의 실패는 없었다.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다키스트 아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과 연합군 40만명을 탈출시킨 덩케르크 작전을 진두지휘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고뇌를 그린 영화다. 올드먼은 자신을 깨끗하게 지우고, 육중한 체형보정 슈트와 분장용 가면, 처칠을 빼다 박은 몸짓과 말투로 정치인 처칠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올드먼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누군지 모를 만한 변신이었다. “역사에 남은 처칠처럼 역사에 남을 명연기”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레옹’의 부패 형사와 ‘제5원소’의 반삭발 무기거래상 등 악역 연기로 알려졌지만 올드먼은 전기영화와 유독 인연이 깊다. 신인 시절 ‘시드와 낸시’에서 섹스 피스톨스 멤버 시드 비셔스를 연기했고, ‘귀를 기울여’에선 극작가 조 오튼을, ‘JFK’에선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인 오스왈드를, ‘불멸의 연인’에선 베토벤을 연기했다.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을 만난 게 결코 행운만은 아니었다.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은 올드먼은 “20년을 기다렸다.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한 상이다. 처칠에게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벅찬 소감을 밝혔다.
올드먼이 달궈 놓은 감동은 맥도먼드가 이어받았다. 1997년 조엘・이선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 ‘파고’ 이후 두 번째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수상이다. 맥도먼드는 ‘쓰리 빌보드’에서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세상과 사투를 벌이는 엄마를 연기했다. 맥도먼드만을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다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뢰에 그는 명연기로 화답했다. 코엔 형제 중 형인 조엘 코엔을 남편으로 둔 맥도먼드는 코엔 형제뿐 아니라,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캐머런 크로우,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의 낸시 마이어스, ‘문라이즈 킹덤’의 웨스 앤더슨 등 대가들이 사랑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쓰리 빌보드’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오스카 트로피를 바닥에 내려놓고 모든 여성 후보자들에게 존경을 표한 수상 소감은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쓰리 빌보드’는 남우조연상 수상자까지 배출하며 기쁨이 배가 됐다. 개성파 배우 록웰은 무모하고도 순진한 마마보이 경찰의 다중적 면모를 연기해 호평받았다. 같은 영화로 함께 후보에 오른 우디 해럴슨마저 극찬한 연기였다. 문제적인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전기영화 ‘아이, 토냐’에서 딸 하딩(마고 로비)을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조련한 엄마를 연기한 제니에겐 여우조연상이 주어졌다.
한국에서도 213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겟 아웃’의 각본상 수상도 의미심장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공포 스릴러로 풀어낸 이 영화의 수상은 할리우드의 반 트럼프 정서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축제는 축제다워야” 유머와 풍자 만발
24개 부문 시상이 이뤄지는 틈틈이 ‘미투’와 ‘타임스 업’ 운동으로 성폭력 추방에 나선 영화인들의 뜨거운 목소리가 TV 생중계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축제 본연의 흥겨움으로 할리우드는 오랜만에 하나가 됐다.
시상식 오프닝부터 재치가 넘쳤다. 수상 소감이 길어져 시상식 후반부가 다급하게 진행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주최측은 ‘최단시간 소감 발표’ 수상자에게 제트스키를 선물로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사회자 지미 키멜은 초시계까지 준비했다.
전 세계 영화팬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올해의 깜짝 이벤트는 ‘관객과의 만남’이었다. 실제로 그 시간에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실황 생중계로 시상식장 스크린에 띄운 키멜은 즉석에서 배우와 감독들을 이끌고는 해당 극장으로 찾아갔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안셀 엘코트, ‘스타워즈’의 마크 해밀, ‘원더우먼’ 갤 가돗 등이 동행했다. 관객 앞에 깜짝 등장한 배우들은 간식을 선물하며 감사를 전했고, 앞으로 불려 나온 한 관객은 다음 시상자를 소개하는 행운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할리우드 투어버스를 탄 관광객을 시상식장으로 데려왔고, 2014년에는 시상식장으로 피자 두 판을 배달해 배우들이 나눠 먹었다. 브래드 피트가 피자 서빙을 해 더 화제가 됐다.
지난해 시상식에 오점을 남긴 작품상 번복 해프닝은 올해 시상식에서 풍자로 승화돼 재미를 더했다. 키멜은 “수상자로 호명되더라도 바로 일어나지 말고 1분 정도 앉아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나”라고 입담을 뽐냈다. 지난해 수상작 ‘문라이트’ 대신 ‘라라랜드’가 적힌 여우주연상 시상 봉투를 잘못 받아갔던 원로배우 워런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는 다시 작품상 시상자로 나서 결자해지 장면을 연출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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