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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분노보다 슬픈 연민

입력
2018.02.27 17:1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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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장의 사진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 했다. 노벨상 시즌이 오면 우리 모두를 조마조마하게 했던 그 분이다. 그 분은 사달이 난 며칠 후 수원시가 마련해준 광교산 자락 ‘문화향수의 집’ 자택에서 잠깐 모습을 보인 후 칩거 중이다. 보인 게 아니라 언론의 카메라에 포획된 것이다. 나무담장에 팔순의 노구를 숨기고 평소의 멋진 중절모 대신 야구모자와 짙은 선글라스, 얼굴을 반쯤 가린 하얀 마스크를 쓰고 집밖의 동정을 살피는 얼굴. 그 얼굴은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니다. 카메라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으리란 사실을 미처 몰랐을까. 경찰의 포위망에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TV에서나 본 어떤 장면이나 사람이 오버랩이 돼 슬펐다.

2.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네가 이해를 좀 해 달라.” 7년 전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선교 봉사 활동을 하던 신부님은 함께 간 여신도에게 집요하게 성폭행을 시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가 그렇게 증언했다. ‘내가 내 몸을 어찌할 수 없다’, 이 말이 가슴을 친다. 이만큼 솔직한 인간적 고백이 어디 있을까. 그는 그 순간 사제가 아니라 본능과 싸우는 세속의 외로운 남자였던 것이다. 그 많은 고해성사를 들으며 막상 신부님은 영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3. “제가 정작 어떨 때는 이게 나쁜 죄인지도 모르고 저질렀을지도 모르고, 어떤 때는 제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거물 연출가는 3인칭 화법처럼 ‘욕망’이란 단어를 말했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왠지 주춤했다. ‘욕망’은 ‘성욕’보다 함축적이다. 성욕이라는 단어는 객관적이고 사전적 의미가 확실하지만 ‘욕망’은 좀 다르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명제다. 그는 욕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욕정’을 욕망으로 연출한 것일까.

우리 모두 이렇게 인간의 두 얼굴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보이지 않던 얼굴은 햄릿이 아니라 하이드였고 프랑켄슈타인이었다. 경외감이 일순간에 배반감과 절망으로 바뀌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니, 그 말로는 충분치 않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 연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면 공분의 댓글 공격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연민은 분노보다 슬프게 나를 엄습했다. 여태까지 침묵 중인 고매한 시인을 빼고 두 사람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제 입으로 토설했으니 그나마 ‘인간적’이었다고나 할까.

두 얼굴이 아닌 자, 어디 있을까.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그토록 자상한 딸 바보를 연기했던 유명한 두 아빠도 리스트에 올랐다. 누군가는 ‘그들도 결국은 나 같은 인간에 불과하구나’라며 스스로를 변명하고 위안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 안에도 우리 안에도 분명 오욕칠정과 이중인격은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다중적 내면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하고 치유하는 게 아닌가. 문학이란 결국은 선과 악, 이성과 본성, 욕망과 구원의 문제일 터다. 작가 개인의 방황과 욕망이 자양분이 됐을 수도 있지만 그 종점은 인간구원에 닿아있다. 작가의 문학세계에서 구원을 갈구했던 우리는 오히려 굴레를 뒤집어쓰게 됐다. 그 상충과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서로를 구원하는 문제만 남았다. 위선과 비겁은 문학의 언어가 아니다(류근). 하루가 멀다 하고 미투의 장부에 이름을 등재하는 문화예술인들. 한 번 각인된 주홍글씨를 지울 수는 없다. 진정하고 순결한 고백과 참회, 성찰과 보속. 그것만이 그들의 작품과 얼굴을 사랑했던 범인(凡人)과 중생을 위로할 수 있는 마지막 품위와 예의가 아닐까. 그게 스스로를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주는 길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는 보셔야 한다.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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