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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공동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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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공동정범

입력
2018.02.25 19: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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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그 날 안방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다. 몇 달 끌던 번역 일을 마친 다음 날이었다. 마감 기한이 촉박해져 외출도 삼가면서 일에 한층 집중해야할 무렵이면, 이상하게도 보고 싶은 책과 영화, 먹고 싶은 음식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모든 욕구가 턱없이 간절해진다. 일이 끝나자마자 ‘공동정범’을, 그것도 조조로 보러갈 마음을 먹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급히 불려온 배관공 아저씨와 위층 주인, 내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의 반장 아저씨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우리 집 안 방 화장실 앞에서, 거실에서, 현관에서 각각 십오 분 이상, 다 합해서 거의 한 시간가량 의견을 나누고, 잠시 말싸움을 하고, 설명을 듣고, 결론을 내린 다음 잡담을 좀 나누고 헤어졌다. 그 시간 내내 나는 짜증스러웠다. 결론은 간단했다. 건물의 외벽 하수도가 얼어붙었고, 그래서 위층에서 사용한 물이 흘러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다가 우리 집 화장실 천장으로 쏟아져 내렸다는 것. 해결책도 간단했다. 이 추위에 하수도를 녹이는 것은 시간과 노력과 돈의 낭비니, 저절로 녹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것. 내가 짜증이 난 이유는 그토록 간단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의 집에서 그토록 길고 산만하게, 쓸데없이, 우스갯소리까지 나누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지만 어쩌다가 계단에서 마주치면 짧게 인사를 나눌 뿐, 이웃이라기보다는 낯선 사람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시간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날 오후에는 ‘공동정범’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영화는 2009년 1월 용산참사에서 살아남았고, 공동정범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다섯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이다. 테러진압을 방불케 하는 경찰의 물대포 공격과 솟아오르는 불기둥, 그리고 무너지는 망루의 충격적 첫 장면 외에는 다섯 사람들의 비교적 차분한 고백, 오랜 세월 억눌려 그 뿌리가 깊어진 감정의 표출들이 이어진다. 내 귀에 가장 인상적으로 들어온 것은 타 지역에서 연대하기 위해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저 도우러 갔을 뿐인데 공동정범이 된 것도 억울하고, 물과 불의 지옥 같았던 망루를 경험한 사람들끼리 모여 아무도 이해 못하고 어디서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자리도 못 갖게 막았다는 원망. 그것에 대해 용산 철거민 쪽에서는 지난 일을 넋두리나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차라리 그 시간에 용산참사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진실규명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게 옳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치명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지옥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끼리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한 때 나의 별명은 ‘용건만 간단히’ 혹은 ‘요약정리’였다. 자주 들었던 질책이나 힐난은 건조하고 매정하다는 것이고. 아무도 이해 못하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우리끼리 술 한 잔 기울이면서 나누자고 했다면, 아마도 젊은 시절의 나 역시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 연대, 이웃이란 단순히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공동의 공간과 시간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경험들, 오고가는 잡담과 쓸데없는 우스갯소리라는 접착제가 만들어내는 단단한 결속력 없이는,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없다. 혹독한 자본과 권력의 공세를 결코 견뎌낼 수 없다.

전세 계약 끝나면 곧 떠나야할 이웃, 언제 옮길지 모르고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직장이라면, 그런 단기간의 관계들이라면, 좋은 공동체나 이웃, 더 나아가 연대가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허약한 토대이다. 내 집에 온 낯선 이웃들이 깎아먹는 나의 시간이 아깝던 사람의 변명이기도 하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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