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핑크’라고 했던가. 문태준(48) 시인의 새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의 표지는 핑크다. 핑크와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동네, 경북 김천 산골마을 출신인 시인은 쑥스러워하지 않았다. “꽃잎 같기도 하고, 홍조 같기도 하고… 봄 느낌이 나지 않나요?” ‘서정시의 적자(嫡子)’로 불리는 이다운 감성일까.
문 시인의 핑크는 관능적이지 않다. 외할머니의 품, 도시생활자가 꿈꾸는 그곳, 당신을 그리며 오래도록 서 있던 자리에 비치는 색일 것 같은, 연꽃 분홍이다. ‘사랑’보다는 ‘사모’라는 말에 더 잘 어울리는. “사모의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생명 세계를 구성하는 낱낱의 존재예요. 사랑보다 우주적인 느낌이랄까요.”
문 시인은 돌을 남달리 사모한다. 돌의 표정과 율동을 읽는다. “돌에는 아무 것도 새긴 게 없었다/ 돌은 투박하고 늙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 돌에 매번 설레었다/ (…) 그리하여 푸른 모과가 열린 오늘 저녁에는/ 그이의 뜰에 두고 가는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이었다”(‘입석(立石)’) 돌에게 말을 걸고는 대답을 기다린다. “돌을 놓고 본다/ 초면인 돌을/ 사흘 걸러 한 번/ 같은 말을 낮게/ 반복해/ 돌 속에 넣어본다”(‘사귀게 된 돌’) 돌은 내 마음이고 너이고 자연이고 시방세계다. ‘사모하는 일’은 결국 세계의 모든 존재 앞에 겸손해지는 일, 마음을 여는 일이어서 끝이 있어선 안 된다.
이번 시집은 1994년 등단한 문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제가 살고 일하는 도시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이를테면 ‘생활 시’를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바다도 자주 등장하고요.” ’잃어버린 세계’에서 ‘오늘 사는 세계’로 시의 공간이 확장됐다는 얘기다.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텐데/ (…)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 텐데”(‘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오전엔 장바구니 속 얌전한 감자들처럼/ 목욕탕에선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그리고 목이 긴 양말을 벗으며/ 선풍기를 회전시키며/ 모래밭처럼 탄식한다”(‘휴일’) 밥벌이의 지겨움에 치여 사는 건 이토록 고운 시를 쓰는 이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된다. 문 시인은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22년 차 불교방송 라디오 PD다.
시라는 게 어쩐지 사치로 느껴지는 과속도의 세상에서 서정시의 역할을 물었다. “시는 무언가를 끝내 움직이게 해요. 서정시든, 사회적 발언을 하는 시든, 그 본질은 같아요. 서정은 다만 부드러운 힘이에요. 누군가의 단호한 마음을 당장 바꾸진 못해도 바뀔 여지를 만들죠. 사람이 움직이고 나면 그림자처럼 여음이 남아요. 그 떨리는 여음에 귀 기울이는 것 역시 서정의 일이에요. 추사(秋史)가 유배지에서 초이선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추워서 벼루가 얼어 터지는 바람에 편지를 더는 못 쓰겠습니다. 보내 주신 차의 향기에 눈을 떴습니다.’ 혹한에도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하는 차의 향기는 우리가 서정시에 기대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비유죠.”
시집엔 동시 3편을 포함해 모두 63편이 실렸다. 이번에도 공손한 시들이다. ‘매직아이’ 책 보듯 의미를 열심히 캐내며 읽어야 하는 시들이 아니라 편안하다. 출간 일주일 만에 중쇄를 찍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의 구분은 없어요.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가 있을 뿐이죠. 정교한 생각, 상상력의 탄력, 섬세한 시심, 강한 지향이 담긴 시가 좋은 시예요. 시가 너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시가 실험의 시대를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시인이 자기 시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건 필요해요. 시가 그 누구에게도 해석되지 않는 미로로 남아 있다면 시인 스스로 돌아봐야죠.”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태준 지음
문학동네 발행∙108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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