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강명 칼럼]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강명 칼럼]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말

입력
2018.02.22 19:00
29면
0 0

며칠간 좀 앓았다. 목이 붓고 현기증이 나서 약을 타러 동네 병원에도 두 번 갔다. 마감을 한참 넘긴 단행본 원고 때문에 고생 중인데, 어떻게든 탈고를 앞당겨 보려고 무리하다 탈이 난 것 같다. 밤을 몇 번 샜는데 다음날 낮에는 매번 거의 아무 것도 못했고 몸만 축나는 느낌이었다.

침대에 누워 처량한 기분으로 왜 이 지경이 됐나 복기해보니,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다. 다 내가 자초한 일.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일정을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지어낸 걸까? 반박하기 어려운 만큼이나 무섭고 위험한 조언 같다.

마음을 비우자, 여유 있게 꾸준히 쓰자는 다짐도 했고, 한편으로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은 얼마나 자기착취에 빠지기 쉬운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땅의 예술가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늘 절박한 심정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예술적인 인정을 얻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인정과 보상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건 정말 힘들다.

그런가 하면 창작자가 예술 작업을 통해 굉장한 희열과 충족감을 맛보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장편소설 초고를 마치는 날에는 마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다. 내 책을 읽고 감동했다는 독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감동해버린다(하지만 속내를 들키면 웃길 것 같아 최대한 무표정을 가장한다). 그런 성취감을 위해서라면 인생의 다른 요소는 꽤 포기할 수 있을 듯한 마음이 든다.

예술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절박하고, ‘아니오’라는 말을 쉽게 못 하고, 많은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된 이들. 신인들, 지망생들은 나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니까,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가 더 눈에 불을 켜고 근로감독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 성적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해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술계에서는 정부가 자신들을 지원할 때 이런 태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이 원칙을 지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런 요구와 다짐의 배경은 십분 이해한다. 우리에게는 기나긴 외압과 검열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 그곳을 치외법권 지대로 두라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예술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나는 솔직히 믿지 않는다. 그곳이 악하고 타락해서가 아니다. 시스템을 개선할 비용조차 아끼고 아껴서 ‘다음 작품’에 쏟아 부으려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니, 그런 개선 작업만큼은 외부에서 냉정하게 추진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나오는 작품들은 뛰어난데 그 작품을 낳은 시스템은 어이없는 문화예술 분야가 많다.

젊은 영화인들의 독립장편영화 제작기를 모은 ‘영화를 꿈꾸다’라는 책을 읽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촬영 현실에 슬프고 놀랐던 적이 있다. 한 영화 스태프는 밤샘작업을 마치고 현장을 정리하다가 다쳐 턱뼈에 금이 갔다. 그런데 눈앞에 자꾸 동료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더란다. 그래서 응급처치만 받은 상태로 촬영장으로 돌아갔고, 의사가 받아야 한다고 했던 수술 없이도 턱뼈는 저절로 아물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뭉클한 사연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기도 하다. ‘턱뼈 저절로 아문 전설’이 회자되면 살이 찢어지는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만약 내 가족이 뼈에 금이 간 채로 영화를 찍겠다고 하면 나는 악역을 맡겠다. 환자가 병원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겠다. 촬영장을 찾아가 작업 안전에 대한 보장을 받아내겠다. 예술을 모르는, 꼬장꼬장하고 오지랖 넓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늙은이가 되겠다.

나는 그 역할을 지금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금전적인 후원은 민간재단이나 기업도 할 수 있다. 강력한 콘텐츠는 제 힘으로 번역가도 만나고 수출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시 감독은 나라밖에 못한다. 추행과 갑질과 체불을 막는 일도 나라밖에 못한다.

‘간섭 없는 지원’의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지금 많이 쓰는 방식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지원하려는 예술 분야의 원로와 중진들로 심사위원회를 꾸려서 그 위원회가 지원 대상을 정하는 것. 이렇게 하면 심사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입김은 차단할 수 있겠는데, 문화권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국민의 돈으로 원로와 중진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구조인 건 아닌가?

예술행정에는 다양한 목표가 있다. 창작을 돕는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현장 예술인들의 안전과 복지도 해결해야 하고, 납세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도 있다. 그 모든 목표를 실현하려면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철학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개입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번 정부야말로 예술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예술인 길들이기’라는 비판에 가장 당당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장강명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