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으로 엽전을 주시던 고향의 설날이 그립습니다
나는 경북 영천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대구에서 영천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 버스도 거의 없어 하루를 꼬박 잡아야 했다.
설날이면 도시에서 돌아온 이들로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항상 화제가 되는 것은 외지에 나간 이들이 얼마나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과 돈을 얼마나 벌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흔하지만, 당시 시골에는 대학생은 물론 의대생은 더 보기 힘들었다.
내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면서부터 그때부터 의사 대접을 받았다. 시골에는 의사가 부족해서 한 마을당 한 명씩 의료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한지의사’라는 제도가 1986년까지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의료인 역할을 한 것이지 의술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더군다나 큰 수술 빼고는 웬만한 치료를 다 하곤 했다. 그러던 중 마을에 의과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 있다는 사실은 이웃 마을까지 자랑할 일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동네 마실을 나가면 나는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은 하나같이 내 손을 잡고 불편한 증상을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라 당황했지만 들어주기만 했지만 해가 갈수록 입소문이 더 나는 바람에 이웃 마을에까지 명의(?)로 통하게 됐다. 영남대학교병원에 비뇨기과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역시 우리 마을 명의가 경북에서 최고의 명의가 되었다’는 말이 한동안 오르내렸다.
어릴 때 설날 기억 중 특이한 점은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아주 특이한 세뱃돈을 받았다. 나는 같은 성씨를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나면 이웃에 세배하러 다니기 바빴다. 당시만 해도 워낙 돈이 없어 세뱃돈 대신 집마다 흔히 널려있는 상평통보를 주곤 했다. 아이들은 무엇인가 준다는 것에 그저 신이 났다. 몇 군데 세배를 하면 주머니에 상평통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상평통보 가운데 구멍에 나이론 끈을 넣어 제기차기하거나 딱지처럼 따먹기도 하고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 모아서 팔았으면 자동차 한 대는 족히 샀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털웃음만 나온다.
설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내가 첫 진료를 한 어른과 비슷한 연배가 되어보니 더 감회가 새롭다. 당시만 해도 다 같이 없이 살아도 정이 넘치는 설날이었던 것이 지금 와서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매년 설날이면 나는 고향으로 가는 그 시절 버스가 있다는 착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그때 그 시절도 돌아갈 수 있다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버스 뒤에 매달려 마음속의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다.
<정희창 영남대학교병원 비뇨기과 교수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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