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최인철의 프레임] 어쩌다 행복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입력
2018.02.08 15:19
29면
0 0

“행복이 좋은 것만은 아니야.”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어.” 어쩌다 이런 말들이 깊이 있는 사람의 상징이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나는 정말 행복해”라는 말을 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좋은 것들 중에 행복처럼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우정, 정의, 사랑, 자유, 평화, 고요, 만족… 이들 중에 그 어떤 것도 행복만큼 경계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벼운 사람이라는 오해를 사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실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자,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심지어 “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싶어요”라거나 “나는 행복보다는 삶의 고요를 누리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쿨한 태도라고 감동하지만 실은 “저는 도형은 싫어하지만 삼각형은 좋아해요”라는 말처럼 모순되는 말이다.

행복이 삶의 무거운 숙제가 되고, 깊이 없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는 수모를 겪게 된 데에는 ‘행복(幸福)’이라는 단어의 책임이 크다. 어떤 단어는 그 자체로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정(友情)이라는 한자어 같은 경우가 그렇다. ‘친구들 사이의 정’이라는 한자어 풀이 자체에서 우정의 개념을 짐작할 수 있으니 요샛말로 이용자 친화적인(user friendly) 단어이다. 그러나 ‘행복’은 그렇지 않다.

사전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첫 번째로 제시된 정의는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다. ‘우연’이라는 특성과 ‘복’이라는 특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마음 상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 상태를 가져오는 조건의 특성에 관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이, 굳이 애쓰지 않았는데도, 혹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일어나는 ‘우연성’을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행복이라는 주관적 경험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르쳐주지 않는 행복 경험의 실체는 무엇일까? 사전에 등장하는 ‘행복’의 두 번째 정의가 힌트를 제공한다.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 두 번째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행복이란 자기 삶에 대한 만족과 보람, 그리고 흐뭇한 상태이다. 행복(幸福)이라는 한자어 자체에서는 결코 얻어낼 수 없는 행복의 정의이다. 기분이 쾌(快)하고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만족한 상태라는 뜻을 전달하기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역부족이라면, 행복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다른 단어를 대신 사용하면 어떨까?

박재희 박사가 2012년에 쓴 한 칼럼에서 행복의 대체할 만한 단어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남의 시선과 기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삶의 자세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만족스럽다. 그 만족의 상태를 자겸(自謙)이라고 한다. 겸(謙)은 만족스러운 것이다.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바로 쾌족(快足)이라 한다.” ‘대학장구’의 ‘성기의무자기 차지위자겸 겸쾌족(誠基意毋自欺 此之謂自慊 慊快足)’를 옮긴 말인데 여기 나오는 ‘쾌족’은 글자 그대로 ‘기분이 상쾌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 행복이라는 단어와 비교하면 훨씬 더 정확하게 행복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행복의 본질을 쾌족이라고 이해하면 커다란 오해 하나를 해결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감사, 희열, 뿌듯함, 경외감, 평화로움, 고요함 이런 것들 말고, 행복이라는 또 하나의 개별적인 감정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충분한 감사를 느끼고 있고 삶의 경이로움과 자연과의 조화가 주는 평안함을 만끽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행복’이라는 감정의 결핍을 경험한다. 이뿐 아니라 고요함, 경이로움, 감사와 같은 감정들을 행복과 대비되거나 심지어 갈등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실수를 범한다. “행복보다는 삶의 고요”라는 모순된 말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을 한자어를 통해서만 이해하게 되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복을 우연히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일상적인 것이 아닌 뭔가 신비롭고 특별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나 행복이 쾌족, 즉 상쾌한 기분과 만족이라면,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아이의 웃음소리, 여름밤의 치맥, 산들바람, 멋진 문장들, 상사의 예상 밖의 유머, 잘 마른 빨래의 냄새,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 보너스, 모처럼의 낮잠, 여행, 바흐, 청명한 날씨 등등 그 리스트에 끝이 없다. 이것들은 다 우리 일상에 있는 것들이다. 행복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