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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내가 반려 아닌 ‘애완동물’을 주장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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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내가 반려 아닌 ‘애완동물’을 주장하는 이유

입력
2018.02.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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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애완동물의 '완'은 일방적인 소유의 관계를 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애완동물의 '완'은 일방적인 소유의 관계를 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금까지 동그람이에 원고를 보낼 때 나는 꼬박꼬박 ‘애완동물’이라고 써 보냈는데 편집진은 그때마다 꼬박꼬박 ‘반려동물’이라고 고쳤다. 실제 공개된 칼럼에는 ‘반려동물’이라고 나오지만 내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는 왜 ‘반려동물’이 아니라 ‘애완동물’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하겠다.

애완동물의 사전적 의미

애완동물이라 부르더라도 생명이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장난감 다루듯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애완동물이라 부르더라도 생명이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장난감 다루듯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애완동물은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애완’의 ‘완(玩)’은 장난감을 뜻하는데, 애완동물은 우리가 장난감을 대하듯이 일방적인 소유 관계를 뜻하다.

이에 견주어 반려동물은 사전에서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고 풀이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동물을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우리가 남편이나 부인을 인생의 ‘반려자’라고 부르듯이 동물을 우리와 대등하게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어사전 풀이처럼 애완동물은 인간의 동물에 대한 일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실제로 동물뿐만 아니라 물품도 애완의 대상이다. 우리 법은 동물을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다. 우리나라 민법은 애완동물을 포함해 동물을 동산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취급하고(제99조 제2항), 형법에서 동물은 재물에 해당되어 다른 사람의 동물을 학대하면 재물손괴죄(제366조)가 성립한다. 

그렇지만 애완동물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장난감을 다루듯이 필요하면 사고 싫증 나면 버리는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동물에 대해 무엇인가 생명이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여긴다. 아마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는 보호자-피보호자 관계가 정확할 것 같다. 어른이 어린이를 보호하듯이 주인은 동물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친권이 있다고 해서 어린이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되듯이 애완동물 주인이라고 해서 동물의 권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법은 이런 생각을 반영해서 수정해야 한다.

‘반려’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

몇 년 전 한 커뮤니티에서 개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몇 년 전 한 커뮤니티에서 개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반려동물’이라고 할 때는 애완동물을 단순히 보호자-피보호자 관계 이상으로 보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반려자처럼 가족으로 생각한다. 동물을 ‘기른다’고 하지 않고 ‘함께 산다’고 말한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미국에서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하면 문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번 칼럼에서는 몇 년 전에 꽤 유명한 남초 사이트에서 논란이 된 게시물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떤 사람이 “모르는 사람과 내 개가 같이 물에 빠졌을 때 개를 구하겠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글을 쓰자, 거기에 대해 “나도 개부터 구하겠다”와 “충격이다”라는 댓글이 무수히 붙어 싸움이 난 적이 있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반려인들 중에서도 나도 개부터 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묻는 것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겠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으냐는 것이다. 우리는 친숙함에 의한 감정이나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감정이나 본능에 기초한 판단이 꼭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나와 가까운 친척, 고향 사람, 인종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것에 끌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연고주의나 정실주의라고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친근감이라는 자연적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모르는 사람과 내 개 중 누구를 구해야 ‘도덕적’인지 생각해 보자. 동물 윤리학자 중 동물의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인정하는 톰 리건마저도 정원을 초과한 구명정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개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때 사람은 네 명에 불과하고 개는 100만 마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개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약간 바꿔 이번에는 입양아와 애완동물 중에서 한쪽만 치료해야 한다면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지 자문해 보자. 아마 반려인이라고 하더라도 입양아와 애완동물 중에서 그래도 입양아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모르는 사람과 애완동물 중 마음은 애완동물에 끌리더라도 그래도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반대로 행동할 때 사람들은 도덕적인 비난을 할 것이고 반려인도 그런 비난을 의식할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도덕 판단도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온다. 

애완동물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권리와 견줄 수는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애완동물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권리와 견줄 수는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직관과 도덕적 추론을 종합해 볼 때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반려인이라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려의 대상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반려는 동물에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최훈 강원대 교수(‘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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