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로시간 단축 사례
80년대부터 수차례 법 개정ㆍ실험
기업 규모ㆍ업종별로 세부안 마련
주간 근로 46→44→40시간으로
초과근무 중소기업 많아
기본급 적고 비효율적 생산구조
주52시간 도입땐 임금 총액 감소
“생산성 높일 혁신 성장이 우선”
“일본이 10여 년에 걸쳐 시행한 근로시간 단축을 3년 만에 달성하려는 조급함이 자칫 좋은 의도마저 무산시킬까 우려됩니다.”
정부가 OECD 2위 근로시간과 최악의 취업률 등에 대한 대책으로 ‘근로시간 단축’ 추진하고 있고, 여ㆍ야도 동의해 조만간 법제화될 전망이다. 이에 호응해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도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만성적 구인난으로 단기간에 근무시간을 줄이기 어려운 중소ㆍ중견 기업들의 현실을 헤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장 도입이 어려운 기업은 순차적으로 속도 조절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여야가 합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기업 규모별로 ▦300인 이상 2018년 7월 ▦50~299인 2020년 1월 ▦5~49인 2021년 7월 등 3단계에 걸쳐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업을 규모별로 쪼개 근로시간 감축까지의 유예기간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 규모만을 기준으로 하는 단순한 접근보다는 업종별 근무 환경과 중소기업이 직면한 근무 시간과 임금 생태계를 정교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기에 생산성 향상을 위한 지원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합리적 임금을 주면서, 근무시간도 줄이자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이상적이지만, 자칫 기업 경쟁력도, 근로자 삶의 질도 모두 무너뜨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기본급이 적어 초과근무로 부족한 임금을 벌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급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임금 총액 급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근무시간을 줄이는 만큼 임금이 줄어드는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며 “고용창출장려금 제도 등 현재 있는 지원책을 52시간 근무제에 맞춰 더 정교하게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동훈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을 법제화해 정부가 강요하는 방식은 취업률을 조속히 높이려는 ‘충격요법’이지만, 장기적으로 위험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법으로 밀어붙인 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현실적 방안을 찾자는 방향으로 해석되는데 이러다 정권이 바뀌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 교수는 “근로시간의 급진적 감축은 정부의 임금 보전 지원, 세제 혜택, 정부 사업 참여 기회 보장 등 중소기업에 대한 적절한 지원정책이 수반돼야 가능하다”며 “정교한 인센티브 정책을 통해 조금씩, 안정적으로 근로시간을 줄여나간 일본이 충격을 줄이면서 삶의 질을 높여간 모범사례”라고 소개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일본의 근로시간 단축과 휴일ㆍ휴가제도’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수차례 법 개정과 실험을 걸쳐 근로시간을 단축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 규모뿐 아니라 업종별 실태도 조사해 ‘접객오락업 종업원 300인 이하’ ‘영화ㆍ연극업 및 보건위생업 30인 이하’ 등 세부적으로 유예 조치 대상을 정하는 방식을 썼다. 1987년 노동기준법 첫 개정 후 주간 법정근로시간을 46시간에서 44시간, 40시간 등으로 순차적으로 줄였고, 대부분 사업장까지 주 40시간 근무가 안착된 시기는 1999년 3월이다. 1980년대 2,100시간대에 달했던 일본의 1인당 연간 총근로시간은 2004년 1,840시간까지 감소했다. 오학수 일본노동정책연구원은 “기업의 사정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근로시간 단축했을 뿐만 아니라 인센티브 등 여러 지원 제도를 도입ㆍ실시해 근로시간 단축이 어려운 중소기업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는 초과근무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비효율적인 생산성을 바로잡을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희 교수는 “야근, 특근에 의존하는 기업 행태가 경쟁력 저하의 원인”이라며 “근무시간까지 길어 기피하는 직장이 되지 않으려면 저임금을 통한 비용절감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기업인들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도 “2010년부터 우리나라는 시간당 부가가치 창출능력 즉, 생산성이 계속 줄고 있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이 많다”며 “근로시간을 주당 몇 시간으로 정해 강요할 게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 성장부터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경직된 노동시장 개선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불필요한 초과근무를 줄이려면 정부가 근무 시간의 총량을 정해주는 것보다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장려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는 파견 노동 규제 완화 등을 통해 단기 고용 확대에 나선 2002년 독일 정부의 ‘하르츠 개혁’을 예로 들었다. 이 교수는 “연장근로와 휴일근로가 많은 이유는 파견직, 시간제 일자리 등을 제한해 노동시장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며 “노동 유연성을 확보해야 근무시간을 줄이면 채용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임금과 생산성이 유지되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채 근무시간 단축만 강요한다면 대기업은 점점 좋은 직장이 되고 나머지는 점점 나쁜 직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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