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BMW, 이탈리아의 페라리, 영국의 맥라렌이 도로가 아닌 얼음 위를 질주하고 있다면, 당신은 봅슬레이 경기를 보는 중이다. 세계 굴지의 슈퍼카 브랜드들이 F1(포뮬러 원) 서킷뿐 아니라 봅슬레이 트랙에서도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미국 봅슬레이 대표팀은 BMW 썰매를, 이탈리아는 자국의 페라리를 탄다. 한국 여자 대표팀 2인승 썰매는 현대자동차에서 만들었다.
‘좋은 썰매’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해 최대한 빠른 속도를 내는 썰매다. 그러나 공기 저항과 마찰력 등 자연 법칙을 뛰어 넘어야 하는 만큼 제대로 썰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과 첨단소재가 동원된다. 슈퍼카 브랜드가 봅슬레이에 관심을 가지는 건 과학적 원리를 동원해 안전하고 빠른 동체를 만드는 것이 자동차의 기술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무게중심과 조종하는 방법, 좌석 위치 등을 조금씩 조정해 가면서 만족할 만한 속도를 도출하는 과정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슈퍼카를 만드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봅슬레이 썰매는 크게 보디(차체), 섀시(골조), 러너(날)로 구분한다. 보디는 탄소섬유 재질을 이용해 일체형으로 만드는데, 탄소섬유는 쇠보다 1,000배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얇아 봅슬레이 썰매에 적격이다. 제조사들은 자동차 실험에 쓰는 풍동(風洞) 실험실을 이용해 시속 300㎞ 이상의 바람을 쏘이고 온도와 기압, 습도를 한계치까지 조절하면서 차체 높이와 좌석 배치 등을 조절한다. 현대차는 3D 스캔 기술까지 동원해 국가대표 선수단 체형에 맞는 맞춤형 동체를 개발했다. 때문에 ‘완벽히 똑같은’ 썰매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썰매가 제 각각 개성을 뽐낸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경기인 만큼 사용되는 썰매 날도 빙질과 날씨에 따라 다양하다.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16개를 휩쓸었던 독일은 상황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100개 이상의 러너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눈이 내려 트랙이 미끄럽거나 기온이 높아 트랙이 녹은 날엔 두꺼운 날을 달아 안전성을 높이고, 춥고 맑아 트랙이 꽁꽁 얼어있는 날엔 얇은 날을 쓰는 식이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변할 수 있는 종목이다 보니 선수들은 썰매 선정에 숙고에 숙고를 한다. 한국 대표팀의 원윤종(33ㆍ강원도청)-서영우(27ㆍ경기연맹) 조는 올림픽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지난달 말까지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라트비아산 BTC 썰매를 낙점했다. 평창 슬라이딩 센터 ‘마의 9번 트랙’을 돌파하기 위해서다. 이용 봅슬레이대표팀 총감독은 “수백 번 테스트 해본 결과, 차체가 미세하게 높아 코너링에 강점이 있는 BTC가 직선 기록이 좋은 현대차보다 올림픽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