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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광화문의 꺼삐딴 리

입력
2018.02.02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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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이 이끄는 북한 예술단 사전 점검단이 서울역에 도착한 1월 22일 오전 보수단체가 인공기, 한반도기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사진을 태우려 하자 경찰이 분말소화기로 불을 끄고 있다. 심현철기자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이 이끄는 북한 예술단 사전 점검단이 서울역에 도착한 1월 22일 오전 보수단체가 인공기, 한반도기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사진을 태우려 하자 경찰이 분말소화기로 불을 끄고 있다. 심현철기자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10년이 막을 내린 2008년 한 외교안보부처 당국자와 점심을 하게 됐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했던 사람이 전 정권 근무 이력 탈색에 열중하는 모습은 불편했다. 새 정부에서 영전이 좌절됐던 그는 결국 다음 정부 때 높은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하는 친일파로 살고, 해방 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친소파가 되고, 6ㆍ25전쟁 후 다시 남한에 내려와 친미파가 되는 소설 속 변절의 화신 ‘꺼삐딴 리’가 따로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났던 다른 당국자는 더 충격을 줬다. 두 정부에서 청와대와 일선 부처를 오가며 핵심 대북 업무를 맡아왔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이명박 정부는 앞선 10년 대북정책 기조를 뒤엎는 ‘비핵ㆍ개방ㆍ3000’을 내세웠다. 그런데 그 당국자는 여기에 맞춰 새로운 정책 제안을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남북 화해를 강조하던 ‘늘공(직업 공무원)’이 보수 정권 등장에 맞춰 변신을 시작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권에 따라 쉽게 변신하는 관료 이야기는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이들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코드에 맞춰 정책 기조를 변침하는 데 선수다. 책상 서랍 속 묵은 보고서를 꺼내 표지갈이만 한 뒤 정권 입맛에 맞게 변주하는 작업도 능숙하다. 과거 정권 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은 온데간데없이 새 정권에 편승하는 식이었다.

지난해 말 통일부와 외교부는 박근혜 정부 5년의 외교안보정책 과오를 자아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과거 정책 실패 책임을 진 관료는 거의 없다. ‘모든 게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였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들렸다. 진정한 성찰 없이 연말연시 어수선한 분위기에 털고 넘어간 듯 했다.

최근 북한의 핵ㆍ미사일 도발이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두고 비판적 여론이 일었던 것도 외교안보 관료들의 이런 행태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2030세대의 달라진 대북관을 정책 책임자들이 잘못 읽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아슬아슬 북핵 위기를 헤쳐나가고는 있는데 외교부 내에는 미국 눈치만 앞세우는 불만 세력이 가득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모두 과거 행태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폐해 때문이다.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장 방남 과정에서 불거졌던 과잉 의전 논란도 10년, 20년 전 남북관계 호황기 때 하던 관행대로 북한 대표단을 대접했다 보수 여론에 빌미를 줬다. 남북 단일팀이나 한반도기 입장도 과거 국민 반응이 좋았다는 이유로 재탕된 측면이 있다. 정책환경 변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부족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 비웃음을 샀던 ‘통일대박’을 옹호하던 이들이니 평화공존이 더 강조되는 최근 흐름을 잡아채지 못한 것도 이해는 된다.

북한 압박 위주에서 협상을 통한 해결에 더 무게를 두는 현 정부 기조에 못마땅해 하는 외교부 일각의 행태는 더 심각하다. 총체적 문제가 드러난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일 합의 주요 책임자들이 잘못을 인정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궤변과 거짓 해명만 늘어놓던 일부 관료들이 또 다른 좋은 보직을 찾아 움직인다는 얘기도 들린다. 군 수사 책임자가 구속될 정도로 상황이 더 심각한 삼각지 국방부는 언급하기도 부끄럽다.

‘광화문의 꺼삐딴 리’ 같은 외교안보 관료들은 이제 극소수라 생각한다. 소신과 영혼도 빼놓고, 진급과 보직에만 목매던 일부 선배들의 행태를 후배들은 답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문재인 정부도 2022년이면 끝난다’며 늘공 식 딴생각 품지 않길 희망한다. 한반도 평화라는 외교안보 분야의 국익은 정권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니까. 4년 뒤에도 흔들리지 않을 지속가능하고 정교한 외교안보 전략을 기대해 본다.

정상원 정치부 차장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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