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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모성애가 시들면 지구도 시든다

입력
2018.01.31 14:5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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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돌의 정원. 지구라는 거석(巨石)을 압축해 놓은 듯한 돌의 정원. 자연스레 배치해 놓은 돌들과 어울려 숨 쉬는 풀, 나무, 새, 흙, 바람, 연못, 태양, 하늘. 그날따라 하늘 숨결인 양 자욱하게 내리던 짙은 안개비. 정원으로 향하는 길가에 도열한 위풍당당한 바위들, 호방하게 서 있는 오백장군들, 민중들의 생존의 땀과 피눈물이 서린 연자매들, 오순도순 모여 있는 천진구무한 동자석들 곁을 지나면서 그 강고한 밀도의 돌들이 왜 근친처럼 느껴지던지. 무심코 서 있는 그 돌들에서 왜 신성한 힘의 현현이 느껴지던지. 문화나 예술 같은 인간적 범주로 담아낼 수 없는 숱한 돌들이 으밀아밀 들려주던 내밀한 이야기들. 얼마 전 다녀온 제주돌문화공원 오솔길을 거닐면서 밀물져 오던 생각들이다.

돌문화공원은 단지 기암괴석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시원의 창조신화가 곳곳에 살아 숨 쉬고, 돌들마다 자비로운 여신의 숨결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랬다. 그 여신의 이름은 거인 설문대할망. 얼마나 장대한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워 두 다리는 관탈산에 걸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새삼 언거번거할 것도 없다.

내가 이 신화에 매혹된 건,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이야기 때문이다. 아들 오백 형제를 거느리고 살았던 설문대할망. 어느 해 지독한 흉년이 들어, 굶주린 오백 형제가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다가 발을 잘못 디뎌 죽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른 채 허기져 돌아온 아들들은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뒤늦게 돌아온 막내아들이 죽을 먹으려고 솥을 젓다가 큰 뼈다귀를 발견하고 어머니가 빠져 죽은 것을 직감했다. 막내는 어머니의 주검을 먹어 치운 비정한 형들과는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며 차귀섬으로 달려가 바위가 되어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형들도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져버렸다. 이것이 오백장군 신화의 전말. 19년째 돌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백운철 단장은 이 신화에 대해 “한라산 영실 분화구의 오백장군 바위가 되어버린 어머니와 자식들의 사랑 이야기는 동서고금 들은 바 없는 모자 전설의 정화(精華)”라고 갈파했다.

설문대할망은 “산보다 더 높고 더 장엄한 모성애”를 상징한다. 돌문화공원 안에는 설문대할망의 모성애를 기리기 위해 그가 빠져 죽은 죽 솥을 연상케 하는 ‘하늘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연못에서는 해마다 설문대할망의 모성애를 기리는 축제와 공연도 열린다고 한다. 하늘연못 둘레를 탑돌이 하듯 도는데, 돌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이의 창조성과 자비심이 느껴졌다. 돌문화공원 조성의 배후에는 설문대할망 신화의 정신이 깔려 있고, 설문대할망의 모성애를 이 불모의 세상과 연결하려는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많으나 생명의 씨앗을 품어 기르려는 모성은 점차 줄어드는 세상.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설문대할망들의 자비심을 폄하하는 세상. “모성애가 시들면 지구도 시든다”(백운철)는 지구생명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언어를 시대착오적인 몽상쯤으로 치부하는 세상.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은, 생명은 다른 생명들의 희생 위에서만 꽃필 수 있다는 것. 설문대할망 신화는 그것을 분명히 환기시켜주었는데, 그 신화는 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보화처럼 각인되었다.

대자연과의 아름다운 공존을 목표로 세워지는 돌문화공원, 하늘이 흔감한다면 나는 오솔길이 끝나는 한적한 산자락에 별서(別墅) 한 채 짓고 싶었다. 이틀을 머물고 떠나던 날 아침, 고요한 공원 숲엔 안개비에 젖은 나뭇가지들마다 윤슬이 반짝거리며 배웅해주었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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