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만 즐기면 골동품” 현대화 힘써
신라 음악 되살린 ‘침향무’ 대표작
파격 추구… 관객 충격에 뛰쳐 나가기도
작년 가을 콘서트 등 말년까지 활발한 활동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지요.”
현대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이자 개척자로 불리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31일 새벽 별세했다. 지난해 12월 뇌졸중 치료를 받은 그는 합병증으로 폐렴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현대 가야금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고인은 올해 가야금 인생 67주년, 창작 인생 56주년을 맞았다. 1936년 서울 가회동에서 출생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악기를 배우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으로 시작을 못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가야금을 만났다. 처음 듣는 가야금 소리에 매혹된 그는 본격적으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인 김명윤,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했다. 경기고 3학년 때 덕성여대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KBS에서 주최하는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며 국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고인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들었던 가야금 소리 속에 “여기 우리 것이 있다, 너 지금 무엇을 방황하느냐”는 옛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소설가 한말숙씨와의 결혼도 가야금이 이어 줬다. 가야금 연주를 좋아하던 한씨가 국립국악원을 자주 찾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1962년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통해 가야금 연주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국악 사상 최초의 가야금 현대곡으로 평가받는 '숲'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그는 당시 ‘미술이나 문학에선 현대적인 작품이 나오는데 왜 우리 음악은 전통음악만 연주하나’란 의문으로 ‘숲’을 작곡했다고 말했다. 196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초청되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생업을 삼는 게 불가능한 시대였던 터라 1960년대 내내 명동극장 지배인, 출판사 사장, 화학공장 기획관리 등의 일을 하며 꾸준히 가야금을 연주했다.
1970년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고인은 국악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1974년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85~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1986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고, 1990년에는 평양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판소리 오정숙, 여창 가곡 김월화, 김덕수사물놀이패 등 인간문화재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방북단은 남북합의로 북한을 방문한 첫 민간인 사절단이었다. 2001년 명예교수로 정년퇴임 후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내며 국악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힘썼다.
대표작으로는 1974년 유럽 공연을 앞두고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미궁' 등이 꼽힌다. ‘침향무’는 ‘침향이 서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뜻으로, 그가 국악을 범아시아적 음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쓴 첫 곡이다. 한국 전통음악이 조선 말기에 매였다고 생각한 그는 조선의 틀을 부수기 위해 신라로 거슬러 올라갔고 신라 불상들이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침향무’를 작곡했다. '미궁'은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 막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듯 연주하고 무용인 홍신자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덧입힌 파격적인 형식의 곡이다. 1975년 명동극장에서 초연했을 때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고 소리 지르며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간 일화도 있다.
황 명인은 2014년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 음반을 내고 지난해 9월 인천 엘림아트센터 엘림홀에서 가곡 콘서트 '황병기 가곡의 밤', 같은 달 롯데콘서트홀에서 '국악시리즈 II – 국립국악관현악단'을 펼치는 등 말년까지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국악상, 호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대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유족으로 소설가 한말숙씨와 아들 준묵(한국고등과학원 교수)・원묵(텍사스A&M대 교수)씨, 딸 혜경(주부)・수경(동국대 강사)씨, 사위 김용범(금융위 부위원장)씨, 며느리 송민선(LG전자 부장)・고희영(주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장지 용인천주교묘원. 발인 2월 2일. (02)3010-2000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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