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호화 궁전ㆍ추억 깃든 옛 집…내가 원하는 세상 맘껏 제작 “백만장자나 마술사 된 기분”
성취감ㆍ스트레스 해소는 ‘덤’ 마니아층도 10대~50대 다양…취미 넘어 자격증 취득까지도
“초등학생 때 어느 공방(工房) 앞을 지나가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의 집에 마당이랑 정원, 오밀조밀한 가구까지 다 들어있는 게 너무 귀여운 거예요. 순간 끌렸죠.”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정근용(16)군은 미니어처(miniature)와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우연히 마주한 공방 유리 너머 세계는 정군에게 소설 속 걸리버가 된 기분을 안겼다. 곧바로 미니어처 공방에 등록한 정군은 7년째 소인국에 푹 빠져 있다. 좋아하는 치킨, 피자, 잡채, 떡볶이는 물론, 갖고 싶은 수납장도 뚝딱뚝딱 만들어 낸다. 미성년자라 술은 마시지 못해도 포장마차는 거뜬히 제작해 주인이 될 수 있다. 돈이 없어도, 나이가 어려도 나만의 소인국에선 못하는 게 없다.
요즘 정군은 평소 동경하던 꿈 속의 유럽풍 서점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6개월 넘게 장기간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이지만 그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아깝지도 않다. 그저 “미니어처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어서 좋다.”
사물을 일정한 비율로 축소해 만든 공예품을 뜻하는 미니어처. 한때 영화 세트나 소품, 진열대 음식 모형 제작에 그쳤던 미니어처가 이제 일상생활에 침투, 장삼이사의 이색 취미로 자리잡고 있다. 미니어처 마니아들은 점토와 물감, 종이 그리고 몇 가지 도구만으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미니어처를 만들어낸다. 차를 마시며 미니어처 작품을 감상하고 전문가 강의까지 듣는 카페가 생겨나는가 하면,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나 포털 사이트엔 각종 미니어처 제작 방법을 공유하거나 완성 작품을 뽐내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가구나 정원, 화분, 쿠킹(요리) 등 미니어처 분야별 제작 노하우를 다룬 책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미니어처가 선사하는 특유의 귀여움은 기본, 스트레스 해소, 성취감, 자기만족 등이 따라붙는다고 마니아들은 입을 모은다. 어떤 이는 “백만장자나 마술사가 된 기분”에 빗댔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다운사이징’은 키 177.2㎝의 주인공이 12.7㎝ 소인으로 변해, 갖고 있던 재산 가치가 120배 뛰어오른다는 설정을 선보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겠지만 미니어처 마니아들의 마음만은 부자다. ‘집 욕심’ ‘가구 욕심’ ‘가방 욕심’을 작고 간편하게 채운다. 정원 딸린 궁전 같은 대저택, 고풍스러운 가구, 상다리가 부러지는 9첩 반상, 수백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을 직접! 만들면 된다. 주부 강모(41)씨는 “얼마 전 딸이 고가 명품 가방을 미니어처로 두 개 만들어 하나는 본인이 갖고 하나는 나한테 줬다”며 “본인이 명품 가방을 살 형편도, 나한테 사줄 형편도 안 된다며 만들어 준 것이지만 진짜 명품을 가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또 어떤 매력이 있을까, 23일 늦은 오후, 경기 고양시 한 미니어처 공방에서 마음 부자들을 만났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도 공방에는 수강생 7, 8명이 앞치마를 두른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학이라 학생들이 눈에 띄었는데,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고 다들 3년 이상 베테랑이라고 한다.
가장 나이가 어린 수강생 박지아(12)양은 잡채와 구절판, 국, 밥이 있는 한식상 미니어처를 만들고 있었다. 초등 2학년이던 4년 전 고모를 따라 입문했다. 박양은 “원하는 것을 뚝딱 만들 수 있어서 지금까지 수업을 듣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집을 미니어처로 직접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박양은 공방에서 마련한 일본 미니어처 현지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장지애(43)씨는 4년간 작품 40~50개를 만들었다. 그는 “어릴 적 살던 집과 비슷하게 연탄보일러 쓰던 집을 미니어처로 만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옛 추억을 미니어처로 살려 내서다. 공방 하향숙(52) 대표는 “미니어처 제작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아우를 수 있다”고 했다. 예컨대 “과거 자기가 살던 집을 미니어처로 만들며 옛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수강생은 경기 가평에 지을 집을 미니어처로 설계해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인의 미니어처 열풍은 어린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kidult) 현상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어른이 어린이나 즐길 법한 미니어처를 통해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이다. 성인을 겨냥한 미니어처 관련 책은 미니어처를 ‘어른들의 인형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 대표는 “전업주부, 회사원, 간호사, 유학준비생 등 수강생 직업이 각양각색”이라고 했다. “3년 전쯤 미니어처를 만드는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인 BJ 달려라치킨이 구독자 72만명을 보유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미니어처가 여러 번 소개되면서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걸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요즘도 매일 1명꼴로 등록한단다.
하 대표에 따르면 미니어처 마니아 여성은 주로 커피와 빵, 피자나 김밥, 햄버거를 비롯한 음식에, 남성들은 주택이나 가구 미니어처를 선호했다. 초보로 입문했더라도 책이나 동영상 등으로 밤새 미니어처 만들기에 몰두한 이들이 많아 제작 수준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날 기자가 두 눈으로 확인한 미니어처 작품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실물의 수십 분의 1 크기 솥뚜껑 위에 삼겹살까지 정교하게 표현하는가 하면, 손바닥 2분의 1 크기만한 서재 책꽂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제목까지 적힌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손톱만한 광어 초밥은 실제 생선과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 하마터면 입에 가져다 넣을 정도였다. 심지어 꼬들꼬들 면발이 돋보이는 라면에서는 라면 특유의 매운 향까지 났다. 실제 고춧가루를 말린 재료를 넣은 효과라고 했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미니어처가 작다고 대충 만들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미니어처 제작은 단순 취미를 넘어 자격증 취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재 관련 자격증은 미니어처지도사, 미니어처방과후지도사, 토탈공예지도사 등이다. 동영상 강의를 이수하고 직접 만든 작품을 제출하는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자격을 취득한다. 자격증을 따면 방과후교실이나 문화센터 강사가 될 수 있다고 하니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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