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나 맹자에 대한 오랜 오해가 함축된 말 중 하나가 “공자왈 맹자왈”이다. 도덕 타령, 뻔한 말이라는 비아냥일 게다. 공맹(孔孟)을 놀리는 것이야 ‘사상의 자유’에 속하지만 그 지혜나 통찰까지 걷어찬다면 본인들의 손해다.
대표적 예가 부녀지인(婦女之仁)과 필부지용(匹夫之勇)이다. 불행하게 이어지는 대형 사고에 슬픔과 위로보다는 정치쇼가 판치는 요즘 그 지혜와 통찰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이 문제는 리더의 역할과 관련된 문제여서 조금 깊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맹자(孟子)’에는 공자가 높이 평가한 정(鄭)나라 자산(子産)에 대한 정반대 평가가 나온다. 자산은 대부로서 정나라 국정을 책임지면 홍수가 나면 자신의 수레를 보내 백성들이 강을 건네게 해준 인물이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자산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맹자는 마치 공자의 이 말을 맞받아치듯 이렇게 말한다.
“(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치하는 도리는 알지 못했다. (해마다) 11월에는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는 도보용 작은 다리를 놓아주고 12월에는 수레용 큰 다리를 놓아주면 백성들은 강 건너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군자가 정치를 공평무사하게 잘 한다면 자신이 행차할 때 백성들을 피해있도록 하는 것도 전혀 문제 될 바가 없다. 어떻게 사람 사람마다 건건이 자신의 수레로 건너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위정자가 매 사람마다 기쁘게 해주려 한다면 매일매일 그 일만 하여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정치인이 제대로 정치를 한다면 정치인의 특권을 누리는 것 또한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정치의 본령은 내버려둔 채 눈앞의 민심을 얻으려 돌아다니는 것은 위정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만 하고 다니는 사람을 아녀자의 어짊(婦人之仁=婦仁)에 빠졌다고 했다.
필부(匹夫)의 용맹도 비슷한 이야기다. 그릇된 용기와 진정한 용기를 가리는 문제인데, ‘논어(論語)’에 나오는 바로 다음 이야기가 그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흔히 용기나 용맹을 대표하는 인물이 자로(子路)다. 한번은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만일 스승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 직전에 공자가 수제자인 안회(顏回)를 칭찬했기 때문에 자로는 은근히 군사문제라면 곧 용맹의 문제이니 당연히 자신을 언급해 줄 것으로 여겨 유도성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 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면서 곧 죽게 되어도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과 나는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마구 달려드는 자로 너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공자와 자로의 다른 곳에서의 일화는 자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자로가 없는 자리에서 공자가 “세상에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까 하는데 나를 따를 사람은 아마도 저 자로뿐일 것이다”라고 하자 자로는 이를 전해 듣고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곧바로 공자는 말했다.
“자로는 용맹을 좋아하는 것이 나보다 나아, 사리를 헤아려 분별하려 하지도 않고 나를 따르려 한다.”
‘뗏목으로 어찌 큰 바다를 건너려 하십니까?’라며 말려야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다. 부녀지인과 필부지용이 사라지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일은 이뤄지지 않고 말만 난무하기에 떠올려본 ‘공자왈 맹자왈’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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