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발에 물집 잡혀 심한 통증
이 악물었지만 긴 랠리 불가능
페더러 “그런 고통 참다니 대단
톱 10능력 충분한 선수” 극찬
물집이 잡히고 터졌다. 터진 곳에 또 다른 물집이 잡혔다. 오른발에서 시작한 물집은 왼발로 옮겨갔다. 결국 빨간 생살까지 드러났다. 진통제도 듣지 않았다.
걷기 조차 아팠지만 정현(22ㆍ랭킹 58위)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걸러 경기가 펼쳐지는 강행군 탓에 양 발은 만신창이였지만 그는 “갈 데까지 가보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26일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벌어진 호주오픈 준결승.
정현은 평소 우상이었던 로저 페더러(37ㆍ2위ㆍ스위스)와 ‘꿈의 대결’을 펼쳤다. ‘황제’의 벽은 높았다. 정현은 통증이 심해 공을 제대로 쫓아갈 수 없었다. 16강전, 8강전에서 보여준 끈질긴 수비는 불가능했다. 2세트 게임스코어 2-5, 30-30 상황에서 결국 경기를 포기했다. 페더러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넨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코트 밖을 빠져 나왔다.
정현의 발바닥 부상은 노바크 조코비치(31ㆍ14위ㆍ세르비아)와의 16강전을 기점으로 점점 심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기권승을 거둔 1회전을 제외하고는 8강전까지 경기당 평균 2시간46분을 쉼 없이 뛰어다닌 탓이었다. 멜버른 현지에서 정현을 지켜본 이진수 JSM아카데미 원장은 “통증이 너무 심해 경기가 없는 날에도 훈련은 하나도 못 하고 오로지 회복에만 전념해야 했다”며 “진통제를 맞아도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라고 아쉬워했다. 곽용운 대한테니스협회장은 이날 단체 응원전이 펼쳐진 서초구 서울고를 찾아 “현지 의료진이 통증을 1~10으로 표현해달라 했더니 정현이 15라고 답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2세트 중반 통한의 기권 패. 하지만 그는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호주오픈을 치르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코트 안과 밖에서 정말 행복했다”고 지난 열흘을 돌아봤다.
이번 대회를 통해 정현이 얻은 최대 수확은 자신감이다.
그는 “2주 동안 정말 좋았다. 16강은 물론 4강까지 왔다. 조코비치, 즈베레프, 페더러 등 대단한 선수들과 경기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고 앞으로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당차게 말했다.
페더러도 정현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경기 후 장내 인터뷰에서 “첫 세트는 (정현이) 워낙 잘 했는데 2세트 들어 움직임이 둔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부상을 안고 뛸 때 얼마나 아픈지 잘 안다”며 “정현은 충분히 톱 10에 들 수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페더러는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정현의 부상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은 뒤에는 “그런 고통을 안고 코트에 나오다니 엄청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칭찬을 이어 갔다. 스포츠 전문채널 유로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전 세계 1위 매츠 빌랜더 역시 “부상에도 불구하고 페더러를 맞아 잘 싸웠다”고 엄지를 들었다.
원래 정현은 호주오픈 직후 불가리아로 날아가 디에마 엑스트라 소피아 오픈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단 보류됐다. 지금은 회복이 우선이다. 그는 “다음에는 페더러 같은 선수들을 상대할 때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더 강해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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