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0일, 대선을 넉 달 앞뒀지만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을 낙관했을 지 모르겠다. 그날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선후보 경선에서 MB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승리했다. 본선보다 어렵고 치열한 예선전이었다. 기쁨에 취해 있을 그에게 ‘공신’ 정두언 전 의원이 고언했다. “친박(근혜)계를 끌어 안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권하더라도 내내 여당과 관계가 골치 아파질 수 있어요.” 친박의 김무성 의원을 당의 원내대표로 밀고, 최경환 의원은 후보 비서실장으로 기용하자는 얘기였다. 그런데 MB는 일언지하에 “이미 다른 사람들로 정했다”고 하더란다. 친이계 안상수 전 의원과, 중립을 표방했으나 MB의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가까웠던 임태희 전 의원이었다.
MB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임기 2년 차인 2009년 ‘미디어법 파동’을 거치며 평 의원에 불과했던 박 전 대통령은 이미 ‘여당 내 야당’이 돼 있었다. 친이계 의원들 입에서 “여의도에 대통령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이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MB는 ‘지는 해’요, 박 전 대통령은 예정된 미래 권력이었다. 흔들리는 청와대가 다시 김무성 의원을 찾았다. 정무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박 전 대통령이 반대했다. ‘궁’에 있던 박 전 대통령과 달리, ‘야전’에서 친박계를 이끌었던 김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거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 장관이라면 몰라도, 정무장관은 정치의 핵심이니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 데 득이면 득이지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삼성동 자택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마주한 김 의원은 이런 생각을 전하며 설득했다. 돌아온 건 “장관이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라는 힐난이었다. 3년 뒤 대선을 앞두고 김 의원에게 다시 도움을 청하며 박 전 대통령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친박의 좌장이셨잖아요. 좌장을 빼앗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두 사건을 돌이켜 보는 건 의미가 있다. 현재 보수당이 이 지경이 된 건 9년을 구가한 ‘이명박근혜’ 시대의 탓이기 때문이다. 두 대통령이 그때 반대파를 끌어안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자충수나 무리수가 아닌 ‘신의 한 수’를 뒀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보수 진영이 지금처럼 뚜렷한 차기 주자 하나 없는 형편이 되진 않지 않았을까. 그런 ‘결정적 순간’은 흔히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게 얄궂다.
문재인 정권도 예외일 순 없다. 집권 초 높은 지지에 취해 야당에 등 돌린 채 일방독주한다면, ‘그때가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허망한 가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독불장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미 연방정부 ‘셧다운(업무정지)’을 막기 위해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긴급 회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막지는 못했으나 막판까지 협상 상대로 인정하고 타협하려 노력했다는 의미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의 리더를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민주주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따로’ 봐야 한다는 데 방점이 있다. 여럿이 있어선 이른바 ‘고공 협상’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공교롭게도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줄곧 문 대통령과의 단독 회동을 요구하며 ‘단체 회동’을 거부해왔지만, 청와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김 교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현송월한테 하듯 야당에 왜 못하냐는 거죠.” 현송월에 들이는 공의 반만 야당에 들여도 쉽게 풀릴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취임 후 지지율이 처음 50%대로 떨어진 지금이 그 ‘결정적 순간’일지 모르겠다. 예방 차원에서라도 협치와 탕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 정권이 끝난 뒤 다시 ‘결정적 순간’을 안타까워하는 칼럼을 쓸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김지은 디지털콘텐츠부 차장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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