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사자
애비게일 터커 지음∙이다희 옮김
마티 발행∙384쪽∙1만6,000원
밀림의 왕이 사자였다면, 21세기 지구의 왕은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먹고, 싸고, 쉬고, 아주 가끔 사람의 손길을 허용한다. 유일한 기능은 ‘귀여움’이다. 인간은 그런 고양이에 홀려 쩔쩔 맨다. 고양이 시중을 드는 ‘집사’를 자처하고, 길고양이를 집으로 들이면서 ‘간택’ 받았다고 기뻐한다. 고양이와 고양이 숭배자와 고양이 사진이 지금처럼 많았던 시절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고양이들을 내 아이처럼 대한 걸까?” 미국 과학 저술가이자 평생 애묘인인 애비게일 터커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전지구적 ‘고양이 현상’을 역사, 생태, 정치, 문화의 관점에서 연구해 ‘거실의 사자’를 냈다. 저자의 성실한 취재와 호쾌한 필치,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역자 이다희씨도 13년차 고양이 집사다. “고양이가 있어 행복하다”는 류의 나른한 에세이가 아니다. 고양이에 빠진 독자라면 불편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을 쏟는 대상을 제대로 아는 건 중요하다. 고양이 사랑이 책 한 권으로 식을 리도 없겠지만.
인간은 매정하다. 동물과의 관계에서 특히 그렇다. 알, 고기, 가죽, 노동력, 충성심을 바치는 온순한 동물을 골라 가축으로 삼는다. 고양이는 예외다. 고양이는 살아남으려 스스로 가축이 됐다. 아기를 닮은 고양이의 외모가 인간을 무장해제시켰다. 인간처럼 나란히 정면을 향한 두 개의 큰 눈과 작은 코, 짧은 턱, 넓은 이마에 평균 몸무게 3.6㎏라는 신체 조건은 인간의 양육 본능을 자극했다. 가임기 여성이 고양이에 특히 취약하다. 고양이도 조금은 노력했다. 전뇌 크기를 줄여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과 공존하는 스트레스 내성을 키우고 좀더 귀여워 보이도록 다리 길이를 줄였다. 울음 소리도 다정하게 바꿨다.
대항해시대 영국인들은 쥐를 사냥하고 물을 거의 먹지 않는 고양이의 자질을 높이 샀다. 배에 태워 지구 곳곳에 실어 날랐다. 이제 고양이가 능력을 보여 줄 차례였다. 고양이 한 쌍이 5년간 생산하는 자손이 모두 생존할 경우 35만4,294마리로 불어난다. 고양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서식지에 살아남아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 치웠다. 전세계 섬에서 멸종한 척추동물의 14%가 고양이에게 희생됐다. 집고양이도 사냥에 가세했다. 고양이의 번성이 생태계엔 비극이었지만, 인간은 고양이 원조를 끊지 않았다. “고양이가 그래도 쥐는 잘 잡잖아…” 틀렸다. 음식물 쓰레기 같은 식량이 널려 있고 쥐를 괴롭히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한, 고양이는 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개와 달리,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의 건강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거의 없다.
여러 나라의 정부가 뒤늦게 ‘고양이와 전쟁’을 선포했다. 고양이 제거 신약을 개발하고 고양이 표적 바이러스를 퍼뜨리거나 잡아 가뒀다. 그러나 게임은 이미 끝났다. 인간은 고양이의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감당할 수 없다. 고양이 중성화 조치도 실은 무용지물이다. 고양이가 짝짓기 스트레스를 덜면 오히려 더 오래 산다. 사는 동안 사냥은 계속 한다. 고양이의 가장 든든한 경호원은 고양이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고양이 개체 줄이기를 시도하는 건 총기 소지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만 큼 무모하다. 고양이가 집으로 들어간 건 세계 정복과 종족 보존의 관점에서 획기적 전략이다. 집고양이는 길고양이를 보호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한다.”
고양이는 인간 옆에서 행복할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만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소통하고 협력해야 살아남는, 그래서 스킨십을 갈망하는 인간이나 개와 다르다. 고양이는 친구가 아닌 거리를, 칭찬이 아닌 단백질을 원한다. 자신을 쓰다듬는 인간을 포식자라 여긴다. 집사가 열광하는, 고양이의 가르릉거리는 소리는 기쁨의 탄성이 아니다. 고양이가 몸을 비비며 다가오는 건 애착의 표식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과 고양이는 생물학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거리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 인간과 고양이의 공존을 위해 고양이를 공부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뻔하지만 당연한 결론이다. “고양이는 말 못하는 짐승이 아니다. 우리가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짐승일 뿐일 수도 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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