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출연硏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7년 일한 비정규 연구원 벼랑 몰아
한 기관서 30여명 해고 당하기도
“인건비 대책 없어 현장서 큰 혼란”
정부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마련한 비정규직 연구 인력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이 정작 정규직 전환 대상인 비정규직 연구원을 해고의 벼랑으로 몰고 있다. 인건비 대책 없이 서둘러 대책을 마련한 탓이다.
23일 연구업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생명공학연구원ㆍ한국화학연구원ㆍ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 다수의 국책연구기관에서 정규직 전환 대상자의 인건비 마련을 둘러싼 노ㆍ사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 인건비는 정부 출연금에다 각 연구원이 외부에서 따 온 수탁 과제비로 충당한다. 기관 입장에선 외부 과제를 계속 수탁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비정규직 연구 인력의 정규직 전환을 주저한다. 신명호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장은 “정부가 재원에 대한 고민 없이 가이드라인만 배포해 현장에선 비정규직 연구인력을 해고하는 등 큰 혼란이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 23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직접ㆍ간접고용 비정규직은 6,503명이나 된다.
한 국책연구기관에서 7년 넘게 일해 온 비정규직 박사연구원 김민수(가명)씨는 최근 기관으로부터 “계약연장을 고려하고 있지 않고, 정규직 전환심의위원회에도 올리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개월마다 계약을 연장해 온 그의 계약만료 기간은 올해 2월이다. 사실상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김 박사는 “오랜 기간 연구를 진행해 온 기관에서 계약연장을 거절하니, 해당 기관보다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원망스럽다”며 “연구인력이 줄면 연구기관의 역량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원들의 고용안정ㆍ처우개선을 위해 지난해 10월 마련한 ‘출연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김 박사는 정규직 전환 대상이다. 가이드라인은 ▦연중 9개월 이상 지속하면서 ▦향후 2년 이상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는 일을 전환대상 업무로 규정하고 있다. 동일 인력이 일정 기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며 여러 프로젝트를 반복 수행한 경우도 향후 2년 이상 계속될 업무에 해당한다.
김 박사는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정규직 전환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하겠다고 하더니 최근 분위기가 급변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처럼 정규직 전환심의위원회 심사대상이었다 사실상 해고통지를 받은 박사연구원이 10명 안팎에 달한다. 김 박사와 함께 일하는 팀장급 연구원(정규직)은 “기관장에게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 ‘분위기 파악하라’는 핀잔만 돌아온다”고 토로했다.
이 기관은 이미 정규직 전환대상자인 박사 취득 3년 이상 연구원 등 연구인력 30여명을 계약연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고했다. 가이드라인은 박사후연구원(박사 취득 3년 이내)과 석ㆍ박사과정 중인 학생연구원, 인턴을 정규직 전환 대상 예외 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 박사는 “진행 중인 정부 연구과제를 끝내려면 아직 2, 3년이 더 필요한데, 제대로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대학 등으로 적을 옮기면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 있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금이 들어간 해당 연구는 중단된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2016년 비정규직 연구 인력의 처우개선이 실시돼 정규직 전환에 따른 추가 인건비 부담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현실과 거리가 먼 해명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외부 수탁과제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국책연구기관 연구역량이 더 이상 약화되기 전에 인건비 확보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반박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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