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한 전례가 없어 자료를 줄 수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표정을 바꾸더니 매몰차게 말했다. 2016년 11월 일본과 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할 때다. GSOMIA가 대체 뭔가 싶어 미리 좀 들여다보려고 국방부에 협정문을 요청했다. 체결국가 명단을 보다가 특이해 보이는 러시아와 헝가리를 콕 집었다. 국방부가 20여 개 국가와 GSOMIA를 맺은 사실을 이미 공개한 터라 협정문을 구하는데 애를 먹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착각이었다. 국방부는 특유의 조직논리를 앞세워 완강하게 반대했다. 해당부서는 눈깔사탕을 입에 물고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애마냥 요지부동이었다. “협정문이 비밀인가요.” 혹시 잘못 알고 있나 싶어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담당자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누가 협정문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나요.” 전례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버티겠다는 의미다. 어이가 없어 다그치듯 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공개한 전례가 없는 것 아닌가요.” 하도 성가시게 물고 늘어졌는지 상대방은 짜증난다는 듯 결정타를 날렸다. “우리는 전례가 없는 것도 중요합니다. 절대로 협정문을 줄 수 없습니다.”
‘괜한 걸 달라고 했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이번에는 외교부에 요청했다. 바로 답이 왔다. 담당자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다 올려놨는데요.”
황당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야 소소한 해프닝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편의에 따라 불리한 내용은 꽁꽁 숨기고, 이상한 잣대로 상황을 왜곡하는 국방부의 얄팍한 술책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최근 불거진 아랍에미리트(UAE)와의 군사협정 논란은 차원이 다르다. 애국심으로 포장한 폭탄을 돌리며 앞선 정부가 후임 정부에게 큰 짐을 지운다면 이건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한 집단 범죄와 다를 바 없다. 군이 온갖 불신으로 지탄받으며 바늘 도둑으로 불렸다면, 이제는 공분을 자초하는 소 도둑이 될 판이다. 전직 수장이 홀연히 등장해 고해성사하듯 자기 변명을 늘어놓은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야간 정쟁에 가려 이번 사안이 얼룩지긴 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국방부의 숨은 조력자들은 여전히 장막 뒤에서 교활하게 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국방부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제멋대로 굴었던 건 문민통제라는 기본 원칙이 작동하지 않은 탓이다. 문민화는 단순히 군인이 맡던 자리에 민간인을 채우는 일이 아니다. 군은 본연의 임무인 국가방위에 충실하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국방부를 견제하고 주요 사안을 보고받으며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래야 헌법의 정신에도 부합하고, 군이 미처 예상치 못한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 안보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과거 청와대와 국방부가 한통속으로 움직이며 일을 그르친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다.
“답변이 제한됩니다.” UAE 사태가 터진 뒤 국방부가 앵무새처럼 읊었던 말이다. 청와대는 국방부로 떠넘기고, 국방부는 눈치만 보며 바짝 엎드리니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군사기밀을 핑계로 국회를 못 믿는 고리타분한 관행은 군의 존재 이유인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청와대가 야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건 늦었지만 다행이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UAE와의 군사협정에 흠결이 있다면 고치겠다고 약속한 만큼 국회의 협조를 구하는 건 필수적이다.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시간만 때운다면 국민들은 아예 등을 돌릴 것이다.
군은 사기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 바탕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이다.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국방부의 능수능란한 숨바꼭질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김광수 정치부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