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 영화 ‘1급기밀’ 인터뷰를 위해 만난 배우 김상경(45)은 윗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바쁜 영화 홍보 일정에 감기가 겹치고 피로가 쌓인 탓이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김상경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엄살 대신 앞으로 있을 또 다른 ‘특별한 일정’을 설렜다. “최승호 MBC 사장님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신다더라고요. 결정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최 사장은 22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릴 ‘1급기밀’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최 사장과 ‘1급기밀’의 인연은 각별하다. 최 사장이 PD시절 ‘PD수첩’에서 방송한 ‘한 해군 장교의 양심선언 편’(2009)이 ‘1급기밀’의 영화적 재료가 돼서다.
“ ‘방산비리’, 전 정부도 반길 소재 아닌가요?”
24일 개봉하는 ‘1급기밀’은 한국군의 고질병처럼 여겨지는 방산 비리를 다룬다. 김상경은 군 비리 내부고발자인 박대익 중령을 맡았다.
기획 의도는 공익적이나 영화 소재로는 대중적이지 않다. 김상경은 5ㆍ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재조명한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 출연한 뒤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다. 영화는 이명박 정부 때 기획 단계부터 삐걱거렸다. 민감한 소재 탓에 번번이 투자는 좌절됐다. 제작비 확보 난항으로 영화 촬영이 밀리자 김상경은 출연료까지 자진해서 낮춰가며 영화 제작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는 배우로서 여러 위험 부담이 있는 이 영화 출연을 왜 ‘고집’ 했을까. 김상경은 “소재가 친정부적”이라고 선수를 쳤다. “시나리오가 정말 재미있었다”는 말과 함께였다.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영화라 판단했어요. 방산 비리란 사회적 이슈에 유머러스한 내용이 잘 버무려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1,000만 영화’가 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할까요? 박근혜 정부 때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정부도 ‘방산비리를 척결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친정부적 내용이니 정부 지원도 올 것 같았는데, 제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요?”
“홍기선 감독이 꿈에 나와 ‘이겼다고’”
김상경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1급기밀’은 개봉 직전까지 암초가 많았다. 여러 영화 관계자들에 따르면 ‘1급기밀’은 애초 지난해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한 대형 배급사가 이 영화의 배급을 추진하다 ‘손’을 놓아 이달로 개봉이 미뤄졌다.
‘1급기밀’은 국내 독립영화 1세대의 간판이었던 홍기선 감독의 유작이다. 홍 감독은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선택’(2003)과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된 사건을 조명한 ‘이태원 살인사건’(2009) 등 사회성 짙은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
김상경과 홍 감독의 인연은 2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상경은 홍 감독으로부터 ‘이태원 살인사건’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당시 출연하지 못했다. 다른 작품과 촬영 일정이 겹쳐서였다. 홍 감독은 수년 뒤 ‘1급기밀’ 시나리오를 들고 다시 김상경을 찾았다. 김상경은 홍 감독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회운동가일 줄 알았는데 그냥 동네 옆집 아저씨였어요. 그것도 잘 안 씻는 분요. 이념적인 얘기를 많이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요, 막걸리 얘기만 했어요. 무슨 막걸리 좋아하냐고 시작해서요. 실제로 부산 촬영 가선 막걸리를 같이 마시기도 했죠. 촬영하면서 이념적 얘긴 단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말 붙이면 ‘에이 난 그런 거 몰라요’라고 손사래 쳤으니까요. 영화로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홍 감독은 2016년 12월 심장마비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영화 촬영을 마친 뒤 바로 엿새 뒤였다. 이 영화는 홍 감독 대신 김상범 편집기사와 이은 명필름 대표 겸 감독이 편집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배우에게도 영화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오게 돼 특별했다. 김상경은 홍 감독의 꿈 얘기를 꺼냈다.
“홍 감독님 비보를 듣고 자는데, 감독님이 꿈에 나왔어요. 얼굴이 너무 좋으신 거예요. 까무잡잡했던 양반인데 혈색도 좋고. 감독님이 웃으면서 ‘우리가 이긴 거예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뭐가 이겼다는 거예요?’ 물었더니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 자체로 이긴 거죠’라고 하시더라고요.”
세종대왕 두 번, ‘찌질남’의 상징… 극과 극 김상경
김상경은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주로 ‘의인’으로 살았다. 데뷔 역은 비리를 파헤치는 검사(드라마 ‘애드버킷’ㆍ1998)였고, 그의 최고 흥행작인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선 미제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었다. 세종대왕 역을 두 번(KBS ‘대왕세종’ㆍ장영실’)이나 연기한 독특한 이력도 있다. 김상경은 “‘1급기밀’을 편집하던 이은 감독이 ‘상경씨 목소린 참 정의로운 것 같다’고 말을 하긴 하더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런 그의 이면엔 ‘찌질남’의 이미지도 강하다. 홍상수 감독과 ‘생활의 발견’ ‘하하하’ ‘극장전’을 연달아 찍으며 보여준 사랑 앞에 구차한 남성의 모습은 강렬했다. 홍 감독과의 작업은 김상경에게 배우로서 ‘개안’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김상경은 ‘생활의 발견’ 이후 촬영 후 모니터를 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생활의 발견’ 찍는데 정말 못나 보이는 거예요. 검사, 의사하다 이런 역 맡으니 저도 보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모니터를 안 봤죠. 그런데 나중에 영화로 보니 전혀 몰랐던 내가 있는 거예요. 새로운 인물이었죠. 배우마다 쓰임새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 누군가에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배우는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옆에 있음직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배우로서 제 옷이라 생각해요.”
김상경은 올해 데뷔 20년을 맞았다. ‘1급기밀’을 시작으로 ‘사라진 밤’과 ‘궁합’등이 올해 줄줄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상경은 “늘 가실업 상태라 항상 힘들고 한 번도 작품 쉽게 간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지난 연기 생활을 돌아보며 “타율(시청률과 관객 동원수)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다행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1급기밀’에 바라는 건 다음과 같은 풍경이었다.
“여당과 야당 원내대표께서 함께 손잡고 극장에 가 이 영화를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방산 비리는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어 누구나 같이 고민하고 척결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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