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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인간의 노예에서 반란군으로 다가온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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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인간의 노예에서 반란군으로 다가온 로봇

입력
2018.01.19 18: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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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차렐 카페크의 ‘R.U.R’

인간 모습의 로봇 최초 묘사

억압받는 노동자 의미 넘어

인류 멸망 이후 주인공으로

로봇은 과학기술 자체를 상징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도 바꿀 수 있어

카렐 차페크의 'R.U.R.'을 번역해 게재한 1925년 <개벽>지.
카렐 차페크의 'R.U.R.'을 번역해 게재한 1925년 <개벽>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최초로 소개한 이는 춘원 이광수이다. 1923년에 춘원은 잡지 ‘동명’에 ‘인조인’이라는 글을 실었다. ‘보헤미아 작가의 극’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은 원작의 줄거리를 요약 소개한 것으로, 원래는 무대 공연을 위해 집필된 희곡이었다. 그 뒤 몇 년 사이에 김기진, 김우진, 박영희 등 당시의 저명한 작가들이 이 작품에 주목하여 평론을 쓰거나 이광수처럼 줄거리를 풀어 쓰는 역술(譯述) 작업을 했다. 박영희는 1925년 잡지 ‘개벽’에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원작을 희곡 형태 그대로 완역 연재했다.

이 작품이 바로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R.U.R.’이다. 제목은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을 줄인 말이며, 세계 최초로 ‘로봇(robot)’이란 말을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노예로 태어난 로봇

물론 ‘로봇’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도 로봇과 같은 것은 있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자동인형’ 쯤에 해당하는 ‘오토마톤(automaton)’이라는 정교한 기계장치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호사스런 고급 장난감일 뿐이었다.

반면 차페크의 ‘R.U.R.’에 나오는 로봇들은 외모는 물론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인간과 똑같다. 오늘날 흔히 ‘로봇’하면 떠올리는 금속성 기계가 아니라 생물과 같은 유기체로 묘사되었으며 심지어 그들끼리 짝을 지어 번식하는 것까지 암시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성실하고 유능한 노예 로봇들. 그들은 갈수록 개량되어 인간의 다양한 직업을 대체하는 반면, 인간들은 점점 게을러져 생물학적으로 퇴보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로봇 제조공장이 있는 섬에서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모두 해치워버린다. 그렇지만 인간이 없으면 그들 역시 태어날 수 없기에 로봇들은 마지막 남은 인간에게 로봇 생명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하도록 압박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간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닌 남녀 로봇 한 쌍이 새로운 출발의 길을 간다.

체코어라는 비주류 언어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 작품은 곧장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불과 3년 만에 30여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과 북미, 일본 등에서 속속 각색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이렇듯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로봇이라는 색다른 설정을 통해 노동 계급의 혁명을 드라마틱하게 다루어서일까. 과연 그것뿐일까.

20세기에 접어든 인류는 발전한 과학기술 덕분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한 거대한 산업적 하드웨어를 역사상 처음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미 19세기부터 심화되어 온 저임금 노동자 계층의 박탈감과 좌절 역시 공존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도 없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 실험이 진행 중이었으나 최종 해법이라는 설득력을 지니기엔 처음부터 한계가 명백했다. 더 근본적인 통찰이나 전망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R.U.R.’은 미래전망, 즉 시공간적 시야의 확장이라는 SF형식을 통해 단숨에 핵심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한계가 있으며, 인간과 비슷하지만 이질적인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서만 비로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간의 시대, 그 다음은 누가 주인일까

‘R.U.R.’에서 로봇을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은유로만 해석하는 것은 근시안적 단견이다. 작품 속에서 로봇은 과학기술적 피조물이라는 성격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유산을 계승하고 보전하여 인간의 멸종 이후에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는 존재, 바로 이것이 차페크가 말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전망이다.

영화 <A.I.>의 한 장면
영화 <A.I.>의 한 장면

흥미롭게도 이러한 주제는 그 뒤 SF의 역사에서 되풀이되어 변주되고 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 2000년 뒤의 미래에 인간은 사라지고 외계인처럼 생긴 신비스런 로봇들이 인간 문명의 유적을 발굴한다.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이 기계(컴퓨터)와 결합하여 사이버스페이스로 터전을 옮기는데 그는 이미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작년에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는 흥미롭게도 ‘R.U.R.’과 비슷한 설정들을 품고 있다. 인간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유기체 인조인간, 그리고 그들이 연대하여 인간에 대한 반란을 꾀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조인간들끼리의 2세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설정까지. 이렇듯 ‘인간 이후’를 전망하면서 인간의 후예를 다양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R.U.R.’의 로봇이라는 발원지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차페크가 ‘R.U.R.’을 통해 제안하는 전망은 편하게 받아들일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만든 로봇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우리의 자리를 대체하는 미래라니. 그러나 여기에 깃든 함의는 생각해보면 오히려 희망에 가까울 수도 있다. 사실 로봇은 노동계급을 은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기술 그 자체를 의미하는 중층적 메타포어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훌륭한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를 얼마나 현명하게 쓰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R.U.R.’ 탄생 100주년을 앞둔 21세기의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기. 다시 곱씹어보는 작가 차페크의 ‘로봇’ 텍스트이다.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 한 장면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 한 장면

일제강점기 조선박람회에 등장한 로봇

‘R.U.R.’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안에 등장한 ‘로봇’이라는 새로운 말은 원 출처와는 상관없이 점점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보통명사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일을 하는 신기한 인간형 기계를 일컫는 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해외의 이런 추세는 우리나라에도 반영되어,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로봇은 차페크의 원작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양상을 보인다. 1929년에 개최된 조선박람회에는 일본에서 ‘동양 최초의 로봇’으로 만들었다는 ‘학천칙(學天則)’이 전시되었고, 1930년 동아일보에는 미국의 소설 쓰는 로봇 소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리기도 했다.

그 뒤로 이 땅에서 차페크의 원작 ‘R.U.R.’은 오랫동안 잊힌 채였다가 1970년에 국립극단에 의해 ‘인조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기록이 있다. 당시 최불암, 손숙 등의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해외의 높은 성과와는 달리 한국 출판시장에서 차페크는 그저 미지의 동구권 작가로 내내 묻혀 있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표작들 대부분은 물론이고 평전도 출간되어 있다. 통렬한 풍자가 담긴 장편 ‘도룡뇽과의 전쟁’같은 작품은 차페크가 왜 국적과 시대를 넘어 불멸의 문호로 상찬하고도 남을 작가인지 잘 보여준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카렐 차페크 1890년 1월 9일 ~ 1938년 12월 25일

카렐 차페크
카렐 차페크

의사이면서 지역 자치 활동에 열성인 아버지와 전설이나 민담 수집에 관심이 많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차페크 출생 당시는 아직 체코공화국이 탄생하기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였다. 반체제적 성격의 동아리 활동이 문제가 되어 학교를 몇 번 옮겨 다닌 끝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그 뒤 프라하와 베를린, 파리의 대학을 다니며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생 때부터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글을 썼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건강 문제로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전쟁을 지켜보면서 정치적 관심이 높아져 시사평론을 활발하게 쓰는 저널리스트가 된다. 이 시기에 정계의 인물들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으며 특히 체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토마시 마사리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체코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마사리크는 차페크의 집에서 열린 지식인 모임인 ‘금요일 남자들’의 고정 멤버였다.

언론인으로 일하는 한편 꾸준히 소설을 쓴 차페크는 마침내 ‘R.U.R.’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 잇달아 주목받는 작품을 내놓았으며 체코 펜클럽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정치평론가로도 활동을 계속하며 당시 세력을 불리고 있던 나치와 파시즘 독재를 맹렬하게 비판했고, 이에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는 그를 ‘공공의 적’으로 지목했다. 체코를 차지하려는 나치 독일의 움직임을 영국과 프랑스가 방관하는 가운데 차페크는 해외 망명의 기회를 얻었지만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독일의 체코 침공을 몇 달 앞두고 지병으로 인한 폐렴이 악화되어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일곱 번이나 오르고도 정치적 이유 등으로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지만 사후에 그를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현재까지도 꾸준히 추앙받고 있다.

화가이자 작가, 시인으로 활동했던 형 요제프와 매우 가까이 지냈으며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로봇(robot)’이란 말은 강제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온 것인데, 차페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형인 요제프가 만든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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