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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ㆍ촛불… 혁명의 동력이 된 ‘선한 분노’

입력
2018.01.16 04: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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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의한 권력에 대한 공분 승화

개별 이기성 넘어 광장의 힘으로

피플파워ㆍ벨벳ㆍ재스민 혁명 등

독재에 눌린 분노가 혁명 불씨로

#2

광장은 분노를 공유ㆍ확인ㆍ심화

‘공분’으로 만드는 용광로 역할

분노는 곧 현실 바꾸겠다는 의지

바뀐 세상 지속 위해 ‘기억’ 중요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를 비롯한 관람객들이 7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소재 영화 '1987'을 관람한 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고영권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를 비롯한 관람객들이 7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소재 영화 '1987'을 관람한 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고영권 기자

1987년 6월 항쟁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의 인권 변호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부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이끌던 그는 당시 시위 도중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진 동아대 졸업생 이태춘씨 장례 행렬 맨 앞줄에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섰다.

이씨가 숨진 날(87년 6월 18일)은 국본이 정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그러나 최루탄 연기는 그날 더 자욱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고, 시위대는 숨을 쉬려고 고가도로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때 이씨가 떨어졌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분노로 뜨거워진 시민들은 기어이 독재 군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 이른바 6ㆍ29 선언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봄이 왔다. 제도로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6월항쟁에서 출발했고, 그 기저엔 정권의 불의와 독재가 부른 시민들의 분노가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겨울 시민들은 다시 들고 일어나 광장에 나왔다. 87년 체제 30년 동안 타락해버린 조국의 민주주의를 목도하고서다.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개인 분노가 공공 공간에 집합하면서 형성된 이른바 ‘공공 분노’는 관료화하고 일반 국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정치 체제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통찰했다.

2018년 겨울,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바람을 탄 것은 한 해 전 촛불혁명의 기억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을 쓴 작가 김경찬씨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2016년 겨울의 경험이 있어서 세대 간 공감대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분노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패러다임적 전환을 요구 받을 때마다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혁명의 동력은 분노

한국뿐 아니다. 80년대 세계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민주화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건 독재에 억눌린 시민들의 분노였다. 부정선거까지 하면서 20년간 철권을 휘두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을 미국 하와이로 쫓아낸 것은 86년 2월 ‘피플 파워’였다. 89년 11월 옛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벨벳 혁명’은 민주화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이 기폭제였다. 20년 넘게 철권 통치를 이어오던 니콜라에 차우셰스크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대통령의 유혈 진압 명령이었다.

‘아랍의 봄’을 가져온 ‘재스민 혁명’도 근원을 찾아가 보면 시민의 정당한 분노다.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남동부 도시 시디부지드에서 과일 행상을 하던 청년이 단속에 항의해 분신 자살했다. 친미 정권의 장기 독재와 부정 축재에 따른 고(高)실업률로 국민들이 고통 받던 때였다. 분노한 시민 10만여명이 거리로 나왔고, 23년간 철권을 휘두르던 벤 알리 대통령이 축출됐다. 재스민 혁명의 열기는 순식간에 아랍권에 퍼져 중동과 북아프리카 각 나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분노는 어떻게 조직화하나

분노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도덕이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문제이기에 앞서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문제이고, 분노는 그 해악에 맞서는 방어 행위이기 때문이다. 주선희 전남대 HK호남학연구원 연구원은 “분노가 억압되거나 사적인 방식으로 해소돼야 할 감정으로만 다뤄질 때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상실되는 건 물론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묻지마 범죄’ 같은 이상 현상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집합적으로 표출될 때 분노는 세상을 움직인다. 항의 집회가 분노를 토대로 형성된다는 것은 ‘2016~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의 참여 결정 요인’을 다룬 최근 국내 연구에서도 입증된 이론이다. 지난해 도묘연 영남대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전국 20~60대 남녀 1,500여명 대상 조사에서 촛불집회 참여자가 비참여자보다 ‘국정농단 게이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유의미하게 강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만 촛불집회 당시 광장에 모인 개별 분노들은 광장이라는 ‘용광로’를 거치며 공분(公憤)으로 승화됐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박영신 교수는 “참여자들만큼 다양한 개개인의 분노는 광장에 들어서면서 정제돼 공공 분노로 만들어졌다”며 “개별 감정들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집합 분노로 구체화돼 그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됐고 개별 이기성을 압도하는 거대한 광장의 분위기에 파묻혀 시위자들이 광장 조직체에 헌신하는 구성원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광장이 시민들로 하여금 분노를 공유ㆍ확인ㆍ심화함으로써 종내 각성하도록 하는 분노의 조직체 역할을 한 셈이다.

공공 분노의 촉매는 대중매체다. 2015년 9월 터키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란 쿠르디의 비극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극대화했다.

분노를 기억하라

2011년 발간돼 세계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킨 책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96세 일기로 2013년 타계)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일갈한다. “분노할 수 있는 힘과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노는 곧 “현실에 참여해 바꾸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관심 없이는 분노도 없다. 위 책의 추천사를 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당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현실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 거리 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며 독자들에게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을 촉구했다.

그 주문은 거꾸로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분개가 실종된 성난 사회’라는 현실의 방증일 테다. 과거에 비해 세상이 복잡다기해지면서 분노의 대상이 불분명해졌다는 사실에 에셀은 개탄한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불가피한 일이다. 그걸 끊임없이 감시하고 고쳐나가는 게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부당한 영국 복지제도와 관료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59세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 2016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감독 켄 로치(82)는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분노하길 바란다”고 했다.

분노가 바꾼 현실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건 관심과 더불어 기억이다. 불온을 두려워하는 기득권 세력은 상업매체를 통해 적당히 분노를 풀어주고 관리함으로써 분출을 차단하고 망각의 조장을 시도한다는 게 문화산업론 연구자들의 경고다. 박성진 성균관대 좋은민주주의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촛불혁명이라는) 비일상적 현실의 기억은 결국 일상에 잠식돼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87년 6월항쟁으로 ‘유권자’가 됐다면 이제 ‘주권자’가 되기 위해 제도화로 분노의 기억을 보존해야 한다는 게 사회운동가들 얘기다. 박성진 연구원은 “촛불혁명은 87년 이후 시민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 했던 시민들의 의지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일단 헌법 개정이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는 “촛불혁명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지금이 개헌의 적기”라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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